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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호의 차별 속으로]
물마중
▲양손을 모은 곳에 파란색 물이 고여 있다. ⓒ김소하 작가
불그스름한 태양이 퇴근을 서두르며 제주 바다를 금빛으로 물들이는 시간, 파도를 깨고 테왁들이 하나둘 튀어 오른다. 뒤이어 숨비소리를 내며 해녀들도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파도 속에서 사라졌다 나타났기를 반복하며 천천히 육지로 다가온다.
동시에 밧줄과 갈고리를 든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 해녀와 무거운 테왁을 들어 올리는 일을 돕는다. 전복과 소라, 미역뿐 아니라 하루의 땀과 숨, 지친 마음이 함께 육지로 올라온다. 제주 사람들은 이 일을 ‘물마중’이라 부른다.
바다에서 돌아오는 이들의 생존을 맞이하는 의례이자, 사람과 바다, 서로를 이어주는 오래된 관계 방식이다. 바다에 몸을 던진 해녀의 삶을 올려주는 손길에는 기다림과 맞이함이 깃들어 있다. 그 손길은 서로의 무게를 함께 들어주는 공동체의 힘이다.
물마중의 손길은 단순한 도움을 넘어선 의미를 담고 있다.
해녀가 하루 동안 맞은 풍랑과 싸움, 노동의 무게, 그리고 몸과 마음의 피로,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육지로 올려주는 일. 그들의 팔과 손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공동체의 마음과 연대, 인간다움의 상징이다. 손길 하나가 서로를 지탱하고, 존재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지친 삶을 기다리고 들어 올려주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복지의 시작이다.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관계이며, 효율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함께 산다’는 단순하지만 근원적인 진리가 그 속에 녹아 있다. 사회가 누군가의 짐을 함께 들어줄 때, 그 사회는 더 강해지고, 더 인간다워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누구도 지친 이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세상 풍파에 흔들리며 괴로워하는 이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올해도 가난한 사람들의 절규가 이어졌다. 지난 5월, 전북 익산의 60대 여성은 “먼저 하늘나라로 간 딸이 있다”라는 쪽지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함께 살던 딸도 사망한 채 발견됐다. 약간의 소득이나 재산이 생기면 수급이 중단되거나 지원 금액이 줄어드는 제도의 삭막함, 근로 가능 연령층에 대한 실질적 수급권 제한이 원인이었다. 지난 3월 강남구 반지하 세입자 50대 남성도 예산 소진으로 긴급복지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 비극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무관심이 낳은 결과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까다로운 선정 기준은 여전히 복지의 문턱을 높여왔다. 부양의무자 기준, 근로능력평가, 소득재산 기준, 비현실적 기준중위소득 등은 복지 사각지대를 넓혀왔다. 2015년 기준중위소득 제도는 국민 전체의 상대적 부를 반영하려 했지만, 현실과는 큰 차이가 있다.
2024년 1인 가구 기준 기준중위소득은 222.8만 원이지만, 실제 중위값은 276~321만 원 수준이다. 최저선 아래에서 살아가는 비수급 빈곤층은 83만~113만 가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통계 속 숫자들은 냉정하다. 제도의 문턱은 여전히 너무 높고, 복지의 손길은 닿지 않는다.
게다가 2024년 7월, 정부는 의료급여 수급자의 외래 본인부담금을 정액제에서 정률제로 바꾸는 계획안을 발표했다. 시행되면 수급자의 의료비 부담이 늘고, 예측할 수 없는 의료비 때문에 치료를 포기할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의료 이용 과다’라는 근거 없는 낙인을 내세우지만, 의료급여 수급자는 만성·중증질환 비율이 높아 병원 이용이 많을 수밖에 없다. 비용 절감을 이유로 권리를 제한하는 정책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침해한다.
사회는 점점 부유해지지만, 가난한 이들의 삶은 더 고통스러워지고 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물마중’이다.
지친 이들을 기다리고 맞이하는 손길, 삶의 무게를 함께 들어 올리는 손길, 제도와 예산을 통해 그들을 지탱하는 공간. 제주 바다에서 해녀와 테왁을 올려주는 손길처럼, 오늘의 사회적 물마중은 빈곤과 불평등 속에서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연대의 시작이다.
우리가 손을 맞잡을 때, 사회는 단순한 안전망을 넘어 인간다운 공동체로 숨 쉰다.
오늘의 사회가 다시 배워야 할 것은 바로 그 ‘물마중’의 손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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