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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릇에 담긴 위로

by MOMO

한 그릇에 담긴 위로


이민호(2025.12.01)


경기가 나빠졌다는 소식은 뉴스 속 헤드라인보다 훨씬 전에, 이미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서 먼저 감지된다. 월급은 그대로인데 생활비는 끝없이 올라가고,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꺼내는 손끝에는 예전보다 더 많은 망설임이 내려앉는다. 불황은 이렇게 조용히, 그러나 서서히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든다. 이런 시기에는 국밥집과 국숫집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이 부쩍 늘어난다.

국밥은 오래전부터 한국 서민들의 삶을 함께 견뎌온 음식이다. 투박한 뚝배기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은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건네는 말 없는 위로처럼 다가온다. 밥과 고기와 국물, 그 단출한 구성은 어찌 보면 너무 소박하지만, 한 숟가락 건져 올리는 순간 묘한 안도가 몸속 깊이 번져온다. “그래, 오늘 하루는 버틸 수 있겠다.” 배가 든든하게 차오를 때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안정감,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더욱 간절히 붙잡게 되는 감정이다.

국수는 그보다 더 단순하고 값싸지만, 가볍지는 않다. 깊이 우려낸 육수 위에 가만히 누운 하얀 면발을 천천히 건져 올리면, 온기가 되살아난다. 누군가에게 국수 한 그릇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절약이지만, 동시에 절약하는 자신을 달래는 손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경기 속 국숫집은 오히려 사람들로 붐빈다. 삶을 축소해야 하는 순간에도 ‘따뜻한 한 끼’만큼은 포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식사를 포기하는 순간 마음까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저가 외식 소비의 방어적 선택’이라 부르지만, 그 말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은 단지 저렴하기 때문에 국밥과 국수를 찾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익숙한 음식이 주는 심리적 안정,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게 하는 위로, 그리고 무엇보다 “사는 게 쉽지 않아도 그래도 살아보자”는 다짐이 배어 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국밥집에서 나란히 앉아 뜨거운 국물을 떠먹는 모습은, 사라지지 않은 공동체의 체온이 남아 있는 풍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경기의 국밥은 음식이라기보다 메시지에 가깝다. 거창한 언어 없이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지. 그러니, 조금만 더 버텨보자.”

우리는 그 목소리를 너무 잘 알고 있다. 피로가 깊은 날이면 유난히 화려한 식당보다 국밥집 간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국밥과 국수가 다시 떠오르는 현상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현실을 투명하게 비춘다. 임금 상승은 더디고 생활비는 가파르게 오르며, 청년들은 기본적인 생계를 감당하기도 어려워지고, 중장년은 장기 불황과 고용 불안 속에서 미래 계획을 미뤄둔 채 ‘오늘’을 견디고 있다. 이런 시대에는 ‘한 끼의 안전한 선택’이 더욱 중요해진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포만감을 주는 음식, 국밥과 국수는 시대의 요구에 정확히 닿아 있다.

하지만 이것을 ‘싼 음식의 인기’ 정도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불황일수록 더 다급히 자신을 돌보는 방식을 찾아낸다. 국밥과 국수는 경제의 지표이면서도 심리의 지표이고, 몸과 마음의 상태를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는 생활의 언어다. 특히 취약계층과 고령층, 불안정 노동자들에게 국밥집은 단순한 식사 공간이 아니라 하루를 버티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서의 식사는 생존을 확인하는 의식이다.

아침 시장 한구석에서 묵묵히 국수를 말아 올리는 손길, 이른 시간 이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발자국, 그리고 밤 장사를 마치고 국물통의 바닥을 바라보며 “오늘도 다 팔렸네” 하고 작은 웃음을 짓는 주인의 얼굴, 그 모든 장면 속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포기하지 않는 이 사회의 생존 방식이 담겨 있다.

불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어쩌면 더 오래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삶을 정리하고, 다시 하루를 살아낼 힘을 모으며 걸어간다. 국밥 한 그릇, 국수 한 그릇은 그 여정에서 가장 작고 가장 확실한 동행이다.

뜨거운 국물에 손을 잠시 녹이며 우리는 속으로 묻는다.

“오늘도 잘 버티고 있는가.”

잠시 숨을 고르고, 아주 작은 고개 끄덕임으로 답한다.

“그래, 아직은 괜찮아.”

불경기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국밥집의 뜨거운 김은 더 자욱해질 것이다. 그 연기 속에는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조용한 안부와 위로가 실려 있다. 한국 사회가 오래도록 국밥과 국수에 기대어 살아온 이유는 결국 그 작은 숨결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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