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억울하지 않은... 오히려 미안했던 삶(1-3)
※ 본 내용은 특정인 및 특정 사건과 무관하며, 허구로 작성된 소설임을 사전에 알려드립니다.
‘째깍째깍...’
조금 전 그들이 나눈 짧지만 무거웠던 이야기 뒤로 짧은 적막이 찾아왔다. 앉아 있는 자리는 어색한 시선처리와 거슬리는 숨소리로 채워지고 있었고...
“무슨 대화들을 그리 열심히 하슈?”
“할... 할머니!”
이내 곧, 주방에 계시던 봉순 댁 할머니가 커피잔이 올려진 둥근 쟁반을 두 손에 들고 나타나시며 앉아 있던 네 명을 바라보신다.
“좋은 일 하시는 분들이라 서로서로 하실 말씀들이 많으신가 봐요.”
봉순 댁 할머니의 말을 듣던 네 명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 앞에 봉순 댁 할머니가 타 주신 커피잔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향긋한 커피 향이 솟아나는 잔을 들고 입가를 적시던 허참내 단장이 봉순 댁 할머니를 쳐다보며 질문을 한다.
“아참, 우리 젊은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은 아마도 봉순 댁 과거에 대해 듣고 싶을 거예요.”
“내 과거?”
“......”
허참내 단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하리와 지성인은 어디선가 꺼낸 노트와 볼펜을 들고 봉순 댁 할머니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런 모습에 당황했던지 봉순 댁 할머니의 얼굴색이 분홍빛으로 바뀐다.
“우리 선생님들이 내 과거가 알고 싶다는 건, 뭔가 도움을 주시려고 하는 것이죠?”
봉순 댁 할머니의 물음에 위풍당당 삼총사가 일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고...
“넘사스러워서... 못난 할망구 사연은 뭐하러 들으려 하는 건지...”
부끄러워하던 봉순 댁 할머니에게 허참내 단장이 또 한마디를 붙인다.
“봉순 댁, 사회복지사들은 복지서비스를 준비하고 제공하기 위해 이처럼 당사자에게 지금의 상황에 대해 직접 이야기 듣거나 필요에 따라 주변인들에게 당사자에 대한 이야기를 묻고 정보를 얻어서 현실적으로 당장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하죠. 그걸 이들은 사례관리라고 말해요.”
※ 여기서 잠깐!
사례관리(case management)의 목적은 복지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 또는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client)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을 보호하며, 서비스가 올바르게 제공될 수 있도록 조정하고 개별적으로 효과를 낼 수 있게 도움을 주는 활동을 말한다. 이와 함께 지역사회가 끊임없는 지원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받는 대상자와 연계시켜주는 중요한 실천영역이기도 하다.
허참내 단장의 설명이 끝나자 위풍당당 삼총사는 동그래진 두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의외로 대단하다는 생각들을 공유한다. 그리고 지성인이 봉순 댁 할머니를 향해 입을 연다.
“할머님, 단장님께서 너무 좋은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저희에게 할머님가 첫 사례관리 대상자로 동의해주셨어요. 그래서 무엇이든 도움을 드리고 싶기에 이렇게 할머님 사연을 듣고 싶은 거죠.”
곧 강하리도 지성인의 말을 거들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말씀하시기에 당장 불편하시다면 말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어요. 저희가 따로 방문해도 되니까요.”
지성인과 강하리의 얘기를 모두 들으신 봉순 댁 할머니는 슬쩍 웃으시며 선한 눈으로 강하리를 쳐다보며 대답한다.
“세상 살며 한없고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누구나 상처받아서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곰 게 되고 또 그러다 보면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사는 거죠.”
“......”
봉순 댁 할머니가 인생무상이란 듯 입을 열자 모두 조용한 가운데 봉순 댁 할머니 입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허참내 단장이 마지못해 운을 띄워보는데.
“봉순이 얘기가 가장 가슴 아프잖아요.”
허참내 단장이 꺼낸 봉순이란 딸아이의 이름에 봉순 댁 할머니 눈가는 촉촉해진다.
“우리 봉순이... 내 딸 봉순이...”
어떠한 사연이 분명 있을 거란 확신을 얻은 지성인은 질문을 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고 하던 강하리의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는데 그냥 가만히 기다려보자는 신호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봉순 댁 할머니는 예전을 회상하며 자신의 과거에 대한 사연을 말하기 시작한다. 지금부터는 봉순 댁 할머니가 말하는 자신의 사연 이야기다.
***
봄동 캐러 갔던 우리 어머니가 빈손으로 돌아오시며 절대 안 된다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어요. 집안으로 들어오시는데 어머니 뒤로 낮부터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가 뭔가를 궁시렁궁시렁거리며 따라 들어오셨죠.
“절대 안 되는 얘기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굉장히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들고 오신 빈 바구니를 대청마루 위로 집어던지더니 곧장 주방으로 향하더라고요. 어머니를 뒤따라오던 아버지는 비틀거리며 빈 바구니가 있던 대청마루에 앉으시더니 나를 훔치듯 쳐다보더군요.
“경아, 너 올해 몇 살이냐?”
“아버지는 내가 몇 살인지도 몰라요?”
“이 년이... 지 엄마 닮아서 성질머리만....!”
조금 전 어머니가 집어던진 바구니를 집으신 아버지가 내게 집어던지려고 하시며 폭언을 하데요.
“너, 시집이나 가자.”
아버지는 나에게 뜬금없이 혼인 이야기를 꺼냈어요. 그 소리에 주방에 있던 어머니가 소리치며 쫓아 나오셨어요.
“이 양반이 진짜! 우리 경이 어디도 안 가니까 어디 마음대로 해봐요!”
“저 여편네가! 다음 달에 혼인시킬거니까 그리 알아!”
“도박이 좋아 하나뿐인 딸 시집보내는 당신이 사람이야?!”
“시끄럽데도! 에잇!”
“퍽!”
도박에 빠진 아버지는 빚을 지게 되었고 약속한 날짜에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저를 첩으로 시집보냈어요. 완강한 아버지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어머니는 눈물만 흘리셨고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와 강제 혼인을 하게 됐죠.
결혼식도 없고 물 한 그릇 떠놓고 저만 연지곤지 찍고 신혼방에 덩그러니 앉아서 밤새도록 서방님을 기다렸어요. 그래도 명색이 신혼 첫날밤인데 별이 지고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방에 들어오지도 않더라고요. 다음날 문을 열고 마당을 봤더니 본처가 여우 눈으로 내가 있는 방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데 소름 돋아서 오줌 지릴 뻔했어요. 그때부터 하루하루 지옥처럼 느껴졌던 것 같아요. 매일 같이 술에 취해 밤늦게 들어오는 남자랑 부부가 된 것도 억울했고 시부모도 없는 집에서 본처의 시집살이를 해야 했으니까요. 그러다 두 해가 지난 다음에서야 첫날밤을 보냈는데, 재수도 없는 년이지... 덜컥 임신이 되었더라고요. 그 사실을 알게 된 본처가 저에게 할 말이 있다며 안방으로 부르데요.
“너, 임신했다며?”
“...예.”
“지저분한 년이 임신을 했으니 분명 네 뱃속에 있는 애도 지저분할 거야. 낳자마자 다른 집으로 입양 보내야 하지 않겠어?”
“네? 마... 마님... 그건... 어떻게 그런 짓을...”
“어디서 말대꾸야?! 더러우니 당장 내 방에서 꺼져!”
“......”
열달을 채우고 산통이 왔는데, 몇 시간을 고생하는데 서방이라는 인간은 눈꼽도 보이지 않고 산파랑 둘이 애를 낳았죠.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아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애는 어디에 있느냐고 아무리 물어보았지만, 그 누구도 아이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더군요. 울고불고 혼자 그러고 있는데, 술에 취한 서방이라는 작자가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그래도 좋은 일이라며 대문에 금줄을 거는 것을 보고 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 뒤로 세상 사는 게 사는 것 같지도 않더군요. 바람 불면 우리 아들 감기 걸릴까, 비 오면 떠내려갈까, 눈 오면 추울까 봐 혼자 발만 동동 굴렀죠. 동네에서 미친년이라고 소문도 났었는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힘든 시기였어요. 그러던 중 친정아버지 부고 소식이 왔어요.
“아이고... 아이고...”
몇 년 만에 친정집 앞에 도착했더니 곡소리가 울려 퍼지더군요. 근조를 알리는 등을 봤는데 심장이 말랐는지 눈물도 흐르지 않았어요. 천천히 집안으로 들어서자 일가 친척분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죠. 관이 있는 마루 앞에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흐르더군요.
“어머니...”
“경이 왔니?”
많이 노쇠해진 모습과 초췌한 어머니 모습이 말랐던 내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었죠.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 한 없이 울고 있는데, 어머니가 저에게 다가와 꼭 끌어안아 주시더니 아주 작은 소리로 말씀하시더군요.
“경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무엇이 미안하고 왜 미안하다고 하는지 알겠는데, 알겠는데...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어요. 아니, 말하기 싫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아버지 때문인 걸 알았지만... 싫었어요...
***
봉순 댁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하리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런 강하리의 모습을 지켜본 이정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곤 찾아낸 티슈를 뽑아 전한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 놀랐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허참내 단장이다.
“봉순 댁, 아들도 있었어요?”
“예. 남들에게 말 못 할 비밀이었는데, 사례관리니 뭐니 이런 말 하니까 이제 다 얘기하고 싶어지네요.”
지성인이 곧바로 봉순 댁 할머니에게 묻는다.
“그때 헤어진 아들의 생사도 모르시는 건가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잖아요. 같은 하늘 아래 있겠거니 생각하고 있는 거니까.”
“......”
울먹이던 강하리는 안타까운 사연에 슬픈 눈물만 흘렀지만, 감정을 억누르며 봉순 댁 할머니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럼... 봉순 씨라는 따님은 어떻게 된 건가요?”
강하리의 물음에 봉순 댁 할머니가 마당 먼 곳을 응시하며 무거운 사연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우리 봉순이는.... 내 딸 봉순이는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