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없는 박물관” — 빛으로 기억을 새기다

박민환 건축가의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뮤지엄

by 토요일의서울



“작품 없는 박물관” — 빛으로 기억을 새기다

박민환 건축가의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뮤지엄



자료 및 이미지 제공 | 박민환건축사무소





“빛과 공간이 전시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박민환 건축가는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뮤지엄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작품 없는 박물관. 그 안에 어떤 유물도, 영상도, 전시 텍스트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빛이 있다. 공간이 있다. 그리고 침묵 속에 영원히 잊히지 않을 기억이 있다.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뮤지엄은 100여 년 전 벌어진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추모하기 위해 예레반 인근, 이미 추모탑이 세워져 있는 장소에 계획된 프로젝트다. 이 건축은 단순히 전시를 위한 박물관이 아니라, 도시적 경로와 기억의 서사를 설계한 프로젝트다.

박민환 건축가는 도심지에서 추모탑에 이르는 전체 여정을 하나의 공간적 서사로 바라보며, 뮤지엄을 단지 안에 ‘배치’하지 않고 그 여정 속에 ‘위치’시켰다. 브리지(Bridge), 터널(Tunnel), 지하(Underground), 틈(Aperture), 지상(On the Ground), 계단(Stair)의 여섯 단계로 구성된 이 시퀀스는, 기억의 감각을 단계적으로 각인시키는 건축적 장치이다.



빛이 기억하는 공간

뮤지엄은 브리지에서 시작된다. ‘아르메니아의 빛을 느끼며 아르메니아의 모뉴먼트로 향하는 첫 번째 여정’이라 명명된 이 공간은, 건축가가 말하듯 "지금도 과거에도 같은 빛" 이 흐른다. 시간은 바뀌었지만 빛은 같고, 그 빛은 아르메니아의 상처를 지워버리지 않는다.

이어서 진입하는 터널은 비가시적이었던 대학살의 어두운 현실을 직면하게 한다. 인공조명 없이 투과된 자연광 위에 프로젝터로 투사되는 이미지들은, 그때 그곳에 있던 이들이 사라졌음에도 빛이 여전히 사건을 기억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지하에 위치한 본 전시공간은 대지의 깊은 틈 속에서 빛이 수직으로 떨어져 들어오는 구조다. 건축가는 이를 “숭고함을 보이는 빛”이라 묘사한다. 관람객은 어둠 속에서 빛을 따라 걷고, 어느 순간 다시 ‘건축의 틈’을 지나 지상으로 진입하게 된다. 빛과 어둠의 전환, 침묵과 명상의 흐름 속에서 기억은 심화되고 감각은 고조된다.





기억의 시퀀스, 건축의 언어로

박민환 건축가가 제안한 길은 단순한 진입로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걷는 여정’이다.


Sequence 01 – Bridge
“아르메니아의 빛을 느끼며, 아르메니아의 모뉴먼트로 향하는 첫 번째 여정.”


Armenia Genocide Museum - 박민환건축사사무소




Sequence 02 – Tunnel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빛은 기억하고 있다.” - <<창에 프로젝터를 장치하여, 과거 제노사이드 이미지를 띄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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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minia 5- 박민환건축사사무소.jpg
Armenia Genocide Museum - 박민환건축사사무소




Sequence 03 – Underground
“지하 공간에 떨어지는 빛은 숭고함을 말한다.”


Armenia Genocide Museum - 박민환건축사사무소




Sequence 04 – Aperture
“어둠에서 다시 빛으로.”


Armenia Genocide Museum - 박민환건축사사무소






Sequence 05 – On the Ground
“대지에 새겨진 공간과 빛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Armenia Genocide Museum - 박민환건축사사무소



Sequence 06 – Stair
“기억의 층위가 빛의 공간으로 드러난다.”



Armenia Genocide Museum - 박민환건축사사무소



이러한 각 공간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빛’을 다룬다. 어떤 공간에서는 천창으로, 어떤 공간에서는 틈을 통해, 또 어떤 공간에서는 디지털 프로젝션으로. 형태가 달라도, 그 모든 빛은 기억을 위한 매개체다.



기억의 장소를 넘어선 건축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뮤지엄은 단순한 추모 공간이나 기념비적 상징물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감각, 빛과 어둠, 고요와 깊이를 통해 작동하는 기억의 장치다. 박민환 건축가가 표현한 것처럼, “빛과 공간 자체가 전시의 내용이 되는 박물관”인 것이다.

‘무언가를 보는’ 박물관이 아니라, ‘무언가를 느끼는’ 박물관.
작품 없이도 공간 그 자체가 메시지이며 기억인 박물관.
이 프로젝트는 공간의 언어로 기억을 새기는 새로운 방식의 추모 건축을 제안한다.



글 맺음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뮤지엄은 빛, 시간, 감각이라는 비물질적 요소를 건축 언어로 재해석한 보기 드문 시도다. 이 건축은 단순한 역사적 재현을 넘어서, 기억 그 자체를 ‘경험’하게 한다. 박민환 건축가의 이 실험은 공간을 통한 역사적 공감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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