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의 진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천천히 보아야 한다. 천천히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본다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음미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주인공 쿠키가 소젖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짜고 있는지, 케이크 레시피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소의 큰 눈과 주인공의 슬픈 눈이 얼마나 닮았는지 깨닫게 된다. 그들은 모두 삶의 전장에서 젖을 짜이고 있는 순한 동물들이었다.
김영민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무언갈 깊이 들여다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버려지는 시간들을 몽땅 주워다 담금질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어느 곳 하나 머뭇대거나 멈추어선 안된다고, 세상 모두가 서로를 부추기는 것만 같다. 이런 즈음에 하나를 깊이 바라보며 음미한다는 건 여유가 있지 않고는 어려울 일이다. 대부분은 매일 먹고살기 위하여, 즐겁지 않은 일을 위하여, 해야만 하는 일을 위하여 온 시간을-생명을- 바치며 산다. 과연 언젠가 사랑하는 대상을 구애 없이 들여다볼 시간은 찾아오긴 하는 걸까?
K는 평생을 '돈'을 벌기 위해 살았고, 그것이 자신의 아내나 자녀를 위한 최선의 사랑이라 여겼다. 그는 원하는 삶이 아닌 '타자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대가를, 어느 정도의 보상을 바랐다. 그게 싸움의 불씨가 되는 줄은 알지 못했다. 툭하면 번지는 아내와의 싸움에 대하여 회상하기를, '하는 게 없고 생각이 없으며 돈만 밝히는' 여자이기 때문이라 말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몰라 이혼을 결심한다. 마지막 손찌검을 계기로 그는 아내에게 집과 전재산을 주고 나왔다. 그는 땡전 한 푼 쥐어주지 않는 가족들과 그간의 노력에 대한 배신감으로 자살을 결심한다. 그에게 돈은 사랑이기에, 그는 모든 삶을 빼앗겼고 조금의 사랑도 남지 않았다고 여기는 듯했다. 자살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빚 2천만 원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본래 해오던 기술이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지게차 사업을 시작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후 돈을 어느 정도 모았고 둘째 딸과는 소소히 연락을 하며 지냈다. 둘째 딸이 대학에 들어갈 때 즈음되어 입학금과 대학 생활 자금을 대어주고자 처절히 다시 돈을 모았다. 그의 돈은 생을 바친 목숨값이나 다름없었다. 둘째 딸의 입학금, 등록금을 대주고 그가 바랬던 건 같은 크기의 애정 어린 관심이었다. 그는 사랑이 대상을 깊이 바라보는 일이라는 걸 오랜 전에 까맣게 눅고 살았다. 애초에 대가를 구하는 돈을 보내며 사랑을 보낸다고 착각했다. 어느 날, 갑질하냐 따지는 딸은 모질게도, 돈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내뱉고야 만다. 그는 오직 그 방법밖에는 모르는데. 마침내 뿜어대기를, "지가 돈이 필요하면 오겠죠. 안 그래요? 일주일 한 번씩이라도 전화 오면 오십만 원 즈음 보태주고, 더 자주 하면 백만 원 정도 보태주거나. 앞으론 그럴 셈이요."
딸에게, 사람들에게 세상에 바라는 건 진정 '돈'을 향한 굽신 거림일까? 그가 원한 바는 조건 없는 사랑이 아니었을까. 돈이 아니면 사랑할 방법을 모른다니, 그 자체로 이미 외롭기 그지없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지 모른다.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그러니까 대상을 넉넉하게 바라보기 위해 먼저 돈을 가져야 한다는 억지 논리를 세운다. 그렇게 일생을 뒤바뀐 순으로 마감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추호의 의심 없이 매일 반복되는 노여움에 평생을 바친다. 이따금 터지는 분노와 우울은 감각을 자극해 외면하거나 누르기 바쁘다.
시지프는 끊임없이 산으로 돌을 끌어올리는, 의미라곤 눈곱만큼도 찾기 어려운 일에 평생을 바친다. 시지프의 진실은 그 일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점이다. 힘겹게 정상에 다다른 시지프는 그 돌을 산 아래로 재차 굴려 내린다. 인간은 무료함을 버틸 수 없다. 우리에게 과연 매일 '해야만'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가능할까? 지금 하고 있는 일 그 자체에서 의미와 즐거움을 찾지 못한다면 그로 인한 보상은 실로 허무할지 모른다. 정상에 오른 영원한 쉼 따위는 죽음과 같기에, 깊이 바라보지 않는다면 무엇도 사랑할 수 없기에, 끝없는 환락은 환멸로 이어지기에. 삶의 향연은 지금 여기, 바로 이곳을 깊이 음미하지 못한다면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