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 궂은날이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구름이 온 세상을 회색으로 물들인다. 토독 토독 빗소리를 따라 높낮이 없는 선생의 목소리가 합주를 이뤘다. 뜬 눈은 어김없이 낮은음을 따라 아래로 쳐진다. 고개를 돌리자 창문 밖 운동장에 공 하나가 비를 맞고 있었다. 피할 겨를도 없이 온통을 세차게 씻겨내린다.
"하민혜!!" 선생의 부름에 화들짝 눈을 떴다. 기다란 눈빛으로 경고를 하시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빗소리와 연주가 시작된다.
나는 지금에만치 자라나도 비가 내리면 곰방 무거워진다. 본래도 빠릿하지 않지만 날이라도 궂으면 조금 더 느려지는 듯하다. 그저 잠이 오는 것은 아니다. 마치 내리는 비와 한 몸이 되어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다. 들뜬 보푸라기가 손길에 차분해지는 것처럼 빗길에 날 샌 모양새가 잠잠하다.
살다 보면 예고지 않은 폭우를 만나기 마련이다. 우산 없는 하굣길에 갑작스레 비를 만났을 때, 놀이터에 앉아 두꺼비집을 만들다 흠뻑 젖었을 때 그 모든 걸 알아버렸다. 인공지능이 무섭게 사람을 흉내 내는 시대에도 여전히 날씨는 뒤죽박죽이다. 비가 한없이 내리는 장마철이나, 몇 날 며칠에 이어지는 폭우를 만나면 잠잠해지는 존재가 심연으로 가라앉아 가만 꺼내기에 닿질 않는다.
비가 그쳤다. 해가 나는 날엔 이불을 빨곤 했다. 축축한 천이 햇볕에 가벼워지는 걸 보며 안심한다. 흠뻑 맞고야 말더라도 해가 뜨는 날 오르는 물길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 어느 날엔가 무지개가 뜨고, 가라앉은 존재는 건져 올려질 것이고. 나는 마흔을 앞에 둔 어느 날, 비에 젖은 생쥐꼴로 주저앉아 이리도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