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이 찾아오면 매번 처음인 양 난해한 이유는 무얼까. 몸도 마음도 얼어붙어 꼼짝 않는 이 느낌을 적잖이 만나봤다. 반가운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주로 괜찮은 척을 해보려는데, 그마저 밀어내고 부정하는거지 결코 환영하는 눈빛은 아니다.
주르륵 그간의 삶을 펼쳐보면 나는 참 오두방정을 떨며 살았다.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생각을 따라 일을 벌이고 다물기를 반복했다. 엄마는 내가 쉬지 않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인 걸 어릴 적부터 알았다고 했다. 이런 삶의 장점은 어떤 사람을 만나도 혀를 차지 않으며 무슨 삶을 보아도 입을 벌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좋지 못한 건 어쩌면 그다지 부럽거나 질투 나는 일도 없다는 점이다. 때아닌 집착을 부려야 할 상황에도 그 집착이라는 것이, 욕심이라는 게 언제나 생경하다. 간절함을 가지려야 가질 수 없는 나는, 나대로 밉고 아쉬운 따름이다. 이번 삶은 이래 일을 벌이고 다물기를 반복하며 그저 살아가려나 싶었다. 분명 다른 삶을 살았대도 대체로 마흔을 전후로 나처럼 삶을 열정적으로 끌고 간 적이 없음에 대하여 고민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수도 없이 오두방정을 떨었던 나나 얌전히 굴었던 사람이나, 성취가 있건 없건 관계없이 어느 즘이면 자신이 삶을 끌고 가고 싶은 본능 같은 게 올라오는가보다. 혹시나 내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의 보통 가정에서 부모들은, 행복한 아이보단 착한 아이를 키우는 게 목표인 듯했다. 어릴 적엔 공부를 잘하는 것과 예의 바른 것만큼 어른들에게 칭찬받는 일은 없었으니까. 지금도 물론 크게 다르지 않다. 뾰족하고 삐뚤빼뚤한 지점을 깎고 다져서 둥글게,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도록 만드는 것이 마치 사람의 존재 이유인 듯 보인다. 튀는 행동이나 남과 다른 생각은 버릇없고 몰상식한 짓이다. 둥글지 못하면 그것 자체로 이미 불효였고 세상에 섞이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길이었다.
교복을 벗고 직장인의 갑옷을 내리고, 장사꾼의 앞치마를 버린대도 나는 또다시 엄마라는 묵직하고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갖춰 입어야 했다. 아니지. 했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옷을 정성껏 만들어 입었다. 그러므로 또다시 '남과 다르지 않은' 엄마가 되어야 했는데. 이 또한 어릴 적부터 반복되었던 일련의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이젠 다른 엄마들을 바라보며 스스로 어딘가는 모자라고 넘치기도 하는 나를 더더욱 깎아내야만 했다. 그건 아이를 위한 사랑때문이라 말할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핑계가 있나.
나는 또다시 삶을 원대로 끌고 가지 않아도 되는 핑계를 하나 얻은 셈이다. 육아는 정말이지 이래 말하기 뭐할만큼 강렬한 체험이다. 아이들은 나의 30대를 집어 먹으며 학교에 들어갔고 9살, 10살즘 되니 어쩐지 더는 가리지 못해 어쩔 줄 모르겠다. 지금 나는 마치 옷을 벗고 세상에 서 있는 듯하다. 아무도 관심이 없대도 내가 나에게 관심을 갖고 바라보니 그런 내가 창피해 눈이 시렵다. 이렇게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고 있자면 불쑥 이런 내가 볼썽사납고 불안하고 무기력해진다.
차라리 종일 갓난아기에게 시달릴 때가 좋았을 만큼. 나는 도무지 무얼 해야 할지, 무어가 하고 싶은지 몰라 초조하고 안달이 나고 만다. 문득 올라오는 황당무계한 꿈에 따라오는 자기혐오는 무엇도 걸치지 않은 나를 한없이 수치스럽게 한다. '네가?' '가당키나 하니..' 오늘도 찾아온 반갑지 않은 목소리에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외진 구석으로 자꾸만 숨고 싶어 진다. 숨어도 숨을 수 없고 쫓아오고야 마는 걸 안다. 별수없이 축 처진채라도 마주 보려 애를 쓴다. 이렇게나 못마땅해하는 나와, 못마땅한 내가 아프다. 아파서 눈물이 줄줄 흐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