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어니스트 헤밍웨이
◎ 출판사 : 민음사
◎ 발행일 : 2012.01.02
고전 살롱을 통해 헤밍웨이의 작품을 만났습니다. 앞서 엽총으로 자살하며 생을 마감했던 휘몰아치는 전기를 읽을 때엔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몇 가지 단편집을 만나고, 이번 완독한 책은 그의 첫 장편 소설인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입니다. 이 작품은 헤밍웨이의 "가장 뛰어난 작품",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이 이어집니다. '로망 아 클레'라 불리는 '실명 소설'에 속하는데요. 이는 열쇠가 달린 소설이라는 뜻으로, 소설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이 실제를 바탕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저는 잠깐 그 시대를 살았던 것 같은, 헤밍헤이와 함께 투우 경기장엘 들른 것 같은 지묘한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단호하고 무심하게 툭툭 내뱉는 듯한 글투에 빠져 헤어 나올 수가 없네요. 억지스럽게 교훈을 강요하지 않는 점도 좋았습니다. 가장 먼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제이크 반스는 부정할 수 없이 헤밍웨이 그 자신을 대입한 인물입니다. 현실에서 도망가려는 로버트 콘을 붙들고 그가 하는 말은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아요.
"삶이 이렇게 빠르게 달아나고 있는데, 정말 철저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어."
"투우사가 아니고서야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라고."
... 중략
"어쨌든 난 남아메리카에 가고 싶어."
"이봐, 로버트, 다른 나라에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나도 벌써 그런 짓은 모조리 해 봤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닌다고 해서 너 자신한테서 달아날 수 있는 건 아냐. 그래 봤자 별거 없어."
"하지만 넌 남미에 가 본 적도 없잖아."
"남아메리카라니 뭐 말라죽은 거야! 지금 같은 심정으로 그곳에 가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곳은 괜찮은 도시야. 어째서 파리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고 하지 않는 거야?"
남미로 떠나려는 로버트 콘의 마음이, 꼭 이전에 가졌던 제 마음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으레 그런 선택을 하죠. 이곳 말고 다른 곳, 오늘이 아니라 내일, 이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 이런 식으로요. 어느 날엔 제가 옮겨 다니며 불만거리를 찾고 떠나고, 다시 찾기를 반복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리석은 일이죠. 여기 없는 게 다른 곳에 있다는 것부터가 벌써 자신을 보지 않고 남 탓을 하고 있단 뜻이니까요.
사기 아닌 사기를 당하고 큰 액수의 돈을 잃은 동생이 어느 날, 이 지긋지긋한 대한민국을 뜨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래 어딜 가고 싶냐 하니, 유럽 어디 시골 마을로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 가고 싶다는 겁니다. 어떤 의미인 줄 아실 거예요. 우리는 으레 실패하고, 넘어지고, 실수할 때 어리석게도 도망가는 선택을 하곤 하니까요. 어째서 외국의 시골이냐, 한국에도 저기 산골 마을이 있는데. 했더니 동생은, 한국에서는 언제나 서로에게 관심이 많고 눈치를 봐야 하는 데 지쳤다는 겁니다. 이 지점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분이 있을까요? 저는 동생에게 그런 마음으로 처박혀 산다 해서 원하는 행복은 없을 거라고 말했어요.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남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줄 아는 사람이라야 처박혀서도 행복할 수 있는 거니까요. 여기서 못하는 것을, 저기 가서 할 수 있다는 것은 오만입니다.
헤밍웨이가 이 작품을 쓴 시기는 1차 세계대전 이후였는데요.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무능력과, 환멸, 좌절 등이 책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 역시 참전하면서 두 다리에 중상을 입었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습니다. 비록 전쟁은 끝이 났대도 그 후유증은 세상을 혼란으로 빠뜨리고 방향을 잃게 했음을 예상할 수 있어요. 책에서 빌과 주인공 제이크가 나누는 대화가 기억에 남습니다.
"넌 국적 상실자야. 조국의 땅과 접촉을 잃어버렸단 말이야. 귀하신 몸이 된 거지. 사이비 유럽 기준 때문에 넌 망치고 만 거야. 죽도록 술만 퍼마시고. 섹스에 사로잡혀 있고. 넌 모든 시간을 일하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지껄이는 데 허비하거든. 넌 국적 상실자야, 알겠어? 카페나 헤매고 다니고 말이야."
"그거 멋진 생활처럼 들리는데. 일은 언제 하지?" 내가 말했다.
"넌 일을 하지 않아. 어떤 패거리 말로는, 여자들이 널 먹여 살린다고 하더군. 네가 성불구라고 말하는 패도 있고."
"천만에. 다만 사고를 입었을 뿐이지." 내가 대꾸했다.
책에는 명확히 명시하진 않지만 제이크가 전쟁통에 입은 상처로 성행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앞에 두고 자신의 무능과 상실을 통감하며 술에 절고, 좌절한대도 결코 지지 않는 인물이에요. 어지러운 세상과 그에 맞게 흔들리는 인물들 속에서도 제이크만의 방법으로 삶을 풀어가는 단단한 헤밍웨이 그 자체를 만날 수 있어요.
"삶을 즐긴다는 것은 지불한 값어치만큼 얻어내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그것을 얻었을 때 얻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누구든지 돈을 지불한 값어치만큼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무언가를 구입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건 아주 멋진 철학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 5년만 지나면 내가 일찍이 알고 있던 모든 훌륭한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 역시 그저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
227p
책의 첫머리에 헤밍웨이 그 자신이 책과 관계되는 시를 적었는데요.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고 저리 돌아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도서
책에 앞서 이 시를 읽으며 그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전쟁통에 사그라드는 목숨과 젊은이들의 방황, 불안을 바라보는 시선을요.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늪에서 끄집어 올려 삶의 의미를 되찾길 바라는 헤밍웨이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른다, 저는 이 부분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전쟁도 실은, 너와 내가 다름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고 삶의 불안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실은 하나로 흘러간다는 걸 깨닫는 것만큼, 남을 용서하고 나를 북돋을 수 있는 앎이 있을까요? 어떤 일이 있어도 바뜩 서는 제이크를 보며 위안을 받았습니다. 이야기는 아름다운 브렛을 향한 치정과 그녀 자신의 불안, 욕망을 중심으로 하지만, 끝자락에 유유히 바다 수영을 하고 있는 제이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삶은 그렇게, 내달리고 치닫기만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 장면이 저에겐 낙원처럼 비쳐 보였습니다.
매번은 아니지만 읽은 책에 대해 적다 보면, 어떤 책은 담을 말이 없고(딱히 남는 게 없음), 때로는 제 지경으로 감히 평을 하기가 곤란한 책이 있습니다.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명성에 걸맞게도 후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를 만날 작품이 남아 있으니 행복한 따름이에요. 그럼 오늘도 즐독 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