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별난 생애

나의 뿌리, 본바탕은 어디일까

by 하민혜

오월 십육일.


길을 나서면 걸음, 걸음마다 갖가지 꽃을 만난다. 꽃이 피는 시기가 다르듯 사람 역시 피어나는 시기가 다르다는 말이 돈다. 제법 많은 연사들이 뒤처진 누군가를 위로한답시고 이런 말을 했더란다. 기억에 남을 이야기다. 그래. 3월에 피는 꽃, 5월에 피는 꽃 하다못해 한겨울에 피어나는 꽃도 있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그런 생각을 품고는 골목길을 지나다 돌틈에 꼿꼿하게 서있는 꽃 한 송이를 마주쳤다. 시선을 빼앗길 만큼 화려한 매무새는 아니었지만 바위를 뚫고 솟은 테가 고독하고 강인했다. 두 걸음즘 뒤편으로는 비옥한 흙땅 위로 솟은 같은 류의 꽃이 넘실인다. 가혹하다. 홀로 바위에 서서 바람결에 몸을 돌리면, 다른 꽃들이 테둘러 안온하게 모여 앉은 모습을 볼 수밖에 없으니.


나는 문득, 태어나는 순간 모두가 이미 피어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는 윤택한 환경에서, 어떤 이는 척박한 땅에서 생을 시작한다. 생명은 별안간 어느 날에 삶을 누린다. 어둠에 갇힌 씨앗일 적은 의식이 날아가기라도 한 건지 그저 깜깜하다. 피어나기 전에는-태어나기 전에- 기억을 잃기로 작정이라도 한걸까. 나의 경우 문득 눈을 뜨니 엄마가 있고, 한국인으로 나서 있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줄 알지만 웬걸. 고개를 돌리면 이곳보다 나은 땅이, 여기보다 훨씬 좋은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치지 못하고 '나는 왜 민들레야? 저 장미 좀 봐. 세상에, 붉게 타오르는 입술. 키도 늘씬하잖아.' 하며 다른 존재와 나를 비교하고 가늠한다. 하염없이 처지를 한탄하고야 만다. 그저 세상에 피어난 것에는 감사할 줄 모른다.


봄이 오면 사람들은 으레 축제를 벌이고 꽃을 따라나선다. 꽃은 어떤 기분일까. 그 자신도 부푼 가슴을 안고 바람결에 몸을 맡기는 연습을 하는 순간을 상상한다. 축제를 앞둔 꽃은, 자신과 조금 다른 친구들을 보며 생각한다. 고개를 이곳저곳으로 돌리며 '쟤는 왜 나보다 진하지?' '얘는 훨씬 연하니까 멋지다'하는 식이다.



꽃축제는 어디까지나 좋은 조건에서 피어난 꽃의 무덤을 보러 가는 일이다. 집 앞에도, 별안간 나무 사이에도 볼 수 있으나 홀로 피어있는 꽃은 철저히 그가 주인공이지, 앞에 선 사람이 주인공일 수 없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꽃들은 밤잠을 설치며 설레는 가슴을 안고 축제날을 기다린다. 과연 들은 대로 기대를 넘은 만큼의 인파가 쏟아진다. 꽃들은 사람들의 배경이 된다. 그들은 한 덩어리로 보인다. 한껏 바람에 일렁이며 춤을 추다 운이 좋으면 한 사람의 플래시를 독자적으로 받을 수 있다. 대부분은 군락을 찍고는 감탄사를 내비친다. 개별적인 존재로 그들을 세세히 바라보지 않는다. 몇몇 꽃은 비관하는 마음에 부러 고개를 숙이고 시듦을 선택한다. 자신의 존재가 하릴없는 배경임에 절망한다. '차라리 돌틈에 피어날 걸, 나는 왜 이렇게 무난한 삶을 살았을까.' 하다 하다 온실 속에 편안하게 자란 것에 대해 불평을 하기 시작하는 거다.






모든 존재는 개별적으로 그만의 독특함과 아름다움을 지닌다. 게 중에 유난히 뛰어난 들, 별 차이 없이 기어코 저물고야 만다. 군락 속에 꽃들 중 몇이 스스로 시든다 해서, 아쉬워할 이는 딱 하나, 꽃의 뿌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뿌리는 온 힘을 다해 줄기로, 꽃으로 생명을 올린다. 사람으로 치면 부모라 할 수 있겠다. 엄마에게만큼은 빛바랜 아이든, 화려한 아이건 필시 눈에 띄는 특별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나는 꽃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나의 오만불손을 가늠한다. 생(生)을 시작한 순간 모든 존재가 이미 피어난 꽃과 같다면,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구나. 타고난 환경, 기질, 외모를 바꿀 수 없으나 그를 불평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피어난 꽃, 살아있는 존재에 대하여 누구라고 더 낫고, 아래일 수 없는 법이다. 우월감도,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도 하등 부질없다. 어느 날엔가 문득 열등감이 느껴지거든, 뿌리를 생각할 것. 또 어느 곳에 놓아도 불평하고 마는 오만함을 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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