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픈 사람을 위로할 줄 모른다. 스물다섯, 게궂게 흐린 날에 유명한 최면사를 만난 일이 있다. 최면에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었고, 그를 아는 친구 덕에 우연히 만나게 된 것뿐이다. 당연히 나는 최면을 바란 적이 없는데 최면사가 강종거리며 나의 전생을 볼 수 있다고 아름 댔다. 비용 받는 일을 무료로 해준다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나저나 최면사들은 원래 전생을 믿는 이들인가? 가시질 않는 의문이 몇 떠올랐지만 낯가리는 성격 탓에 잠자코 지시를 따랐다. 아니면 그의 이름 석자, 최면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위압감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시계추를 바라보며 길게 숨을 들이켜다 어느새 꿈속을 헤매었다. 전쟁통에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너덜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악지르는 사람들 틈에, 눈 시린 연기를 휘저으며 떨어진 팔을 봉합하고, 다리를 여몄다. 끈적이는 피가 손에 엉겨 붙었고 지독한 악취가 들끓었다. 최면에서 깨어난 후, 그는 눈을 반짝이며 내가 전생에 간호사였다고 말했다. 그럴싸하다만 그 사람이나 그 꿈을 믿지 않는다. 나로 말하자면 금발에 파란 눈으로 불어를 나부리는 꿈을 꾼 적도 있고, 일렁이는 갈색 머리의 미국인이었던 꿈도 꾼 일이 있다. 그것도 다 전생이라면 모를까.
4살 미운 딸이 떼를 부리며 울기 시작하면, 할머니인 내 엄마는 방에 데려다 놓고 혼자 실컷 울게 하라고 했다. 그 태도가 얼마나 단호한지 언니와 내가, 그리고 동생이 어떤 훈육을 받으며 자랐는지 가늠할 수 있다. 나는 기어코 아이를 혼자 방에 두지 못해 엄마에게 한소리를 듣곤 했다. 울면 달려가고, 지독하게 떼를 쓰면 붙들어 이야기를 나눴다. 훈육의 방침에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게 아니다. 어쩌면 모든 일이 그렇듯 훈육에도 장단이 있다고 해야 맞다. 우리 가족은 아프거나 다치면 혼자 있길 잘한다. 힘든 일이 있을수록 굴로 들어간다. 마치 어릴 적 엄마가 방에 데려다 놓은 것처럼 이젠 자발적으로 혼자만의 방에 들어가는 거다. 키가 자라는 만큼 눈물은 말랐고, 입은 다물어졌다. 아쉬운 건 스스로 해치우는 버릇덕에 남들을 위로하는 일에 서툴다는 점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 아픈 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도와줄 일이 있는지 살피는 건 본능에 가깝다. 다음이 문제다. 나는 상대가 손을 내밀지 않는 한, 먼저 다가가 위로하거나 다독이는 게 어렵다. 내가 스스로 굴에 들어갈 때 누군가 다가와 나의 모습을 보는 일이 불편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나는 병이나 사고로 입원할 때에도 누군가 병문안을 오는 게 근질거린다. 사람들도 나와 같을 거라는 넉 없는 착각은 매번 문제를 일으킨다. 자신을 걱정하지 않는다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며 오해를 사기 좋은 지점이다.
오해를 산들 오래 관성이 붙은 버릇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겉보기와 다르게 무심한 나는 그렇게, 무심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결혼하고부터 남자 친구의 가족들이, 곧 나의 가족이 돼버린 후로 이 문제가 종종 수면 위로 떠오른다. 어머니는 나의 엄마만큼이나 이곳저곳이 아프고, 종종 다치시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쑥을 삶다가 얼굴에 화상을 입으셨다. 지난번에는 눈에 이상이 와서 큰 병원엘 가서 수술하고, 한창 치료를 다니셨다. 으레 어른들이 그렇듯 누군가가 병원을 함께 가길 원하신다. 통원 치료라도 의사의 설명을 듣거나, 수납하는 일까지 복잡한 일을 젊은 누군가가 단박에 처리해 주길 바라신다. 가능하다면 일을 빼고 얼마든지 함께 가드릴 수 있는 일이다. 한데 걱정하는 소리를 안 한다고 여기시거나, 앓는 소리에도 반응이 없단 이야길 들을 때면 못내 속이 떠죽거린다. 감감하려다가도 억울한 마음이 탁구공처럼 튀어 오른다.
그래 나는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티셔츠가 가로 접혀 있어도 불편한 줄 모르는 무심한 사람이다. 손바닥 온데 화상을 입으면서도 뜨거운 냄비를 내던지면 안 되었다. 작은 곰처럼 무겁게 참고 자랐다. 최면사의 말대로, 전생에 간호사였다면 보통 사람보다 참는 버릇이 더할런지 모를 일이다. 어리눅은 덕에 분명 혜택도 있지 않을까, 이런 나도 기계처럼 제 할 일은 하지 않나, 입이 무거운 덕에 속으로만 보깨는 거다. 생겨먹은 게 어지간히 무디고, 서풋하게 서성이는 나란 걸 잘 안다. 입은 무겁고 멍멍해 보인대도, 속으로는 꽤나 복작스러운 날이 많다. 어린 시절 가로진 방구석에 몸을 구부리고 울음을 삼키고 삼킬 적에, 그 반복의 반복으로 감정의 날을 무디게 만든 듯 보일 뿐이다. 사람들은 나의 두터운 얼굴을 벗기고, 무거운 침묵을 도려내면 여리고 여린 속살이 들어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