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by 하민혜

왜 그랬냐니까 엄마가 밑바닥을 찍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냉정하게 말해 너를 망치면서까지 엄마를 건져 올려야 했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잠시 머뭇대더니, 엄마가 애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딸이 고등학생 때 이혼하고 받은 위자료로 커피숍을 차렸다. 가진 돈에 더해 대출을 끼고 인테리어를 했다. 어쩐지 손님이 적었다. 시간은 흐르고 점차 밀리는 월세에 결국 헐값에 가게를 팔게 된다. 딸은 금세 성인이 된 후였고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엄마는 마트 안에 아동복을 파는 가게를 차린다. 그마저도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커피숍에서 생긴 대출금을 다 갚지 못한 상태에서 빚이 더 늘어났다. 그럼에도 가게를 접지 못하고 있었다. 가게를 넘기고 나면 정말은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쯤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딸을 잡고 앓는 소리를 시작했다. 500만 원만 있으면, 했다가 500만 원을 들고 오면 300만 원이 필요하다고도 했고 다시 500만 원이기도 했다. 딸은 무슨 수로든 그 돈을 가져다 주기로 마음먹고 악착같이 돈을 구해 가져다 바쳤다.


엄정하게 돌아보면 엄마는 바닥을 찍은 게 아니었다. 물론 빚이 생긴 건 사실이지만 딸을 쥐어짤 정도였다면, 집을 팔고 가게도 팔며 버틸 수 있었다. 고생다운 고생을 해본 일이 없던 엄마는 그저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남편에게 기댔고, 친구든 딸에게든 닥치는 대로 의지하는 삶에 습관이 든 것뿐이었다. 쭈글거리는 살이 있대도, 엄마는 예쁜 얼굴을 가진 분이셨다. 나이가 들어 굵어진 몸통만큼 목소리도 사나웠지만 특유의 애교는 사라지질 않았다. 딸은 아빠처럼 끔뻑 엄마에게 넘어갔다. 툭하면 앓는 소리를 내는 엄마를 두고 딸은 뒤돌아 피눈물을 짜며 돈을 모아 가져다 바쳤다. 차는 큰 차를 타셔야 한단다. 늘어진 주름살을 올려붙이는 수술을 해야겠단다. 돈은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엄마를 통해 물 새듯 줄줄 흘러 나갔다.


바닥이란 무엇일까, 더는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넘어간 상태를 두고 바닥이라고 말하는 거다. 딸은 엄마에 대한 분노로 가슴에 한이 맺혔다. 그럼에도 여전히 반복적으로 울고, 웃고, 화내며 살아간다. 엄마는 정말 바닥이었을까. 딸은 어느 날 불쑥, 엄마에게 함께 자살하자고 말한다. 혼자 죽고 싶어도 철없는 엄마를 두고 갈 수가 없어서다. 술에 취한 날이면 어김없이 딸은 악을 지르며 울고, 함께 죽잔 말을 했다.


누군가는 가족이니까, 사랑하니까,라고 말하며 이 상황을 위로할지 모른다. 나로서는 가만 보자 하니 점점 화가 일어나는 거다. 엄마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딸은 엄마가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그때, 앓는 소리를 내는 엄마를 뿌리쳤어야 했다. 왜 뿌리치지 못했을까. 나는 여기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나의 마음을 본다.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고, 돈이 많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 때 내 마음은 그랬다. 그 돈으로, 올라붙은 능력으로 혼자 신나려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 그러니 누군갈 돕고 싶다 할 때, 순수하게 돕고 싶은 게 본심인지 그로 내가 인정받고 싶은 게 본심인지를 보자는 거다.


딸의 입장에선 엄마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아빠는 재혼했고, 형제 하나 없이 엄마와 단둘이었다. 엄마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거다. 정말은 그렇다. 내가 인정받고 싶어서 엄마를 도운 거다. 모든 말과 행동은 관성이 붙는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고 열 번은 더 쉽다. 처음은 인정 한 번 받았으니 목적 달성이지만, 다음은 더 큰 걸 요구할 터다. 같은 크기로 더는 감동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받은 걸 금세 잊고 마는데, 매번 주는 사람이 같을 적엔 더한 법이다. 고마워하지 않고, 자신을 인정해주지도 않는 엄마에게 딸은 격노한다. 시시 때때 싸움이 붙는다. 조롱과 멸시가 오간다. 관계는 끝도 없이 틀어진다.


줄곧 이 모든 책임은 엄마에게 있다, 고 했던 딸이다. 나는 책임과 잘못을 구분하라 말하고 싶다. 잘못은 엄마에게 있다 해도 후의 모든 일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누가 침을 한 바가지 뱉는대도, 그 사람을 향해 주먹을 들이밀지 돌아서 무시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잘못은 침 뱉는 사람이라도 삶이란 게 그렇다. 오다가다 똥도 밟고, 괜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이런 때 똥을 나무라고, 돌의 크기를 분석할 필요는 없잖은가. 일이 틀어진다는 건 감정이 틀어졌다는 거다. 감정은 내 마음에서 솟는 건데도 우린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한 돌부리만 분석한다. 똥 밟은 신발도 닦고, 깨진 무릎을 치료하긴커녕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하면서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는 거다. 이런 식으로는 영락없이 삶은 문제 상황으로 뒤덮이고 만다.


돌아서 다친 내 마음부터 살필 일이다. 탓을 한다는 건 여전히 아픈 내 마음은 보고 있지 않은 거다. 인정받고 싶은 건 다시 말해 사랑받고 싶다는 건, 그마만큼 사랑을 주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처 입은 나를 살피면 스스로 얼마나 엄마를 사랑하는지가 절절이 느껴질 터다. 난장판 치는 엄마를 보며 지금처럼 눈을 부라리는 게 아니라, 도리어 애틋한 마음이 일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가해자나 피해자로 나누는 건 관계의 종말로 향하는 길이다. 인연을 끊으면 되지 않나, 할지 모르지만 말은 쉽다. 사랑하는 사람을 끊어내는 일은 나를 도려내는 일과 같다. 우리는 상대를 변화시킬 수 없는 스스로를 인정하고, 다만 상대를 부족한 그대로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도울 수 있는 만큼만 도울 일이고, 그 외로 버거운 만큼은 손을 놓아야 한다. 엄마로서는 고난의 시간을 통해 삶에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깨닫고, 드디어 진정한 홀로서기가 가능할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옳다고 믿고 있는 걸 꽉 쥐고 있을 때, 삶은 풀 수 없는 문제가 된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며 내 멋대로 아이들을 바꾸거나 휘두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반드시 저 길로 가면 넘어질 거라고 염려하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오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혹여라도 넘어지거나 아플 적에 그 고통을 함께 바라보고, 느껴주는 일뿐이다. 아픈 걸 보기 싫은 내 마음에 아이를 휘두르다간, 아이의 삶을 전반적으로 망치게 될지 모른다. 해결하려고, 나서서 아프지 않게 하려고 하는 그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살핀다면, 우린 좀 더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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