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을 말하라 했다. 불쑥, 그런 이야길 나누기 시작한 거다. 얼굴을 꼭 한 번 보았던 사람이 있고, 처음 만난 분들이 절반이었다. 책으로 소통하고 지냈던지라 다른 자리에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진 않았다. 고민이라, 뭐라도 꺼내야겠는데 불현듯 떠오른 건 '돈'문제였다. 내려놓고 비우려 해도 실은 돈과 멀어지기 어렵구나 싶어 조소했다. 애초에 밥벌이를 떼어놓고 삶을 말할 수 없어서지, 애써 좌절하는 마음을 위로 올린다. 돈을 더 벌 것인가, 말 것인가 인데 고상하게 말해,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고민한다고 말했다.
거기까진 괜찮았는데, 누군가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달라고 말했다.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어디까지나 조잘대는 입이 멈출 줄 모르고 갖은 사연을 쏟아내는 거다. 어정 띄게 가까운 직장 동료 거나, 이웃한테는 쉬이 하지 않을 이야기이다. 더욱이 나도 모르게 자의식이 덧대어져, 어설프게 리본을 에두른 양 그간의 삶에 대한 최후 진술이 펼쳐졌다. 이런, 누가 내 입 좀 막아다오.
앞뒤로 살을 붙여야 할 사연이 많고도 많은데, 이게 다가 아닌데, 싶은 거다. 짧고 굵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결국 나는 '돈을 잘 버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한 꼴이다. 실은 돈에 관해라면 글에도 종종 묻어난다. 물론 그간 나와 일해온 수많은 이들과 가족들이 이를 보증할 테니, 돈을 잘 벌어온 건 거짓말은 아닐 터다. 다만 나란 인간의 서사를 이야기할 때 그런 애씀이 마치 자랑인 양, 혹은 피해자인 듯 비치는 지점에 반드시 이불킥을 하게 되는 거다. 자랑할 요량은 아닌데 자랑이 되어버리고, 죄인인 듯 말하려던 게 아닌데 수치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래 언제나 입이 방정이지.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말을 막지 못하고 속으로는, '지금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돼?'라고 되뇌고 만다. 눌러둔 덕에 이른 새벽 궁둥이를 붙이고 명상하는 중에마저 속이 시끄럽다.
설상가상 건네 주신 마법책을 펼치곤 '겸손하라'는 메시지를 보고 말았다. 온갖 명언이 무작위로 적힌 책이었다만 우주 끝으로 소멸해 사라질 것 같은 마음을 들킨건지. 앞에 앉은 분께서 자기 자신이 잘하는 걸 잘한다고 말하고, 못하는 걸 못한다 하는 것이 겸손이라고 정의해 주신다. 가만 그 말을 곱씹으니, 내가 건넨 칭찬에 끝도 없이 손사래를 치는 이가 떠올랐다. 그에게 느껴지는 건 겸손이 아니라 미지근한 불쾌감이었다. 칭찬을 칭찬으로 듣지 못하는 게 왠지 불편했다. 그래 겸손이란 게 참 어려운 일이다. 정답은 없대도 이런 찝찌름한 느낌이 드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이혼을 준비할 즘 제법 오래 알고 지낸 이가 내게 상황을 물어왔더랬다. 가만 앉아 궁금증을 풀어주었는데, 그녀는 내게 어쩜 그렇게 흔들림 없이 차분하냐, 고 되물었다.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일지 몰라도 실은, 그런 식의 말을 많이 들어왔다. 화도 안 나세요? 라던지, 어쩜 그렇게 감정 조절을 잘하니? 라던지, 아마 나로서는 이런 찝찝함을 곤란해하기 때문에, 되도록 입을 다무는 습관이 든 것 같다. 성질대로 신경질을 내려면 커다랗게 입을 벌려야 하는데, 그건 내게 엄청난 모험이다. 뒤따를 후회는 단순히 이불킥으로 끝나지 못하고 팔을 휘적이며 침대를 뽀사놓을 지도 모른다.
최근 몇 차례 강연 때 느끼는 감정은 내 이야길 들어주는 사람들의 다정함에서 느껴지는 행복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니 누군가 내 이야길 하염없이 들어주는 일이 얼마나 고맙고 기쁜 일인지 모른다.
물론 대화라는 건 내 말을 누군가에게 집어넣는 게 아니라, 듣는 일이 큰 영역을 차지한다. 앞에 사람의 말이 반나절밖에 나아가지 않아도, 다음 자신이 할 말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단다. 혼자 떠벌렸던 말들로 머리는 무겁고, 엉덩이가 가벼운 건 내숭인건가. 실컷 떠들어놓고 부끄럽다나. 참말로, 이쁘게 보려다가도 이쁘지가 않은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