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죽음은 상실이다. 이별이고, 아픔이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어제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의사로부터 안락사를 권유받을 적부터 가슴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고양이를 입원시키고 집에 와서는 미어지는 가슴으로 눈물을 흘렸다. 엉엉 소리 내며 아이처럼 울었다. 가르랑 대는 따뜻한 털이 앉은 무릎 위에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산다. 한 마리는 이제 5년이 넘었고, 어제 곁을 떠난 고양이는 고작 생후 7개월이다. 먼저 우리 집을 지키고 있던 고양이는 공장에 버려진 생명이었다. 한 주먹밖에 되지 않던 고양이가 이젠 한 덩치를 차지한다. 흔히 길냥이라고 부르는 특성이 몸에 밴 친구다. 내킬 적엔 곁을 내어주지만, 보통은 귀찮아하고 불러도 노려보기만 한다. 그와 달리 지난겨울부터 함께 한 두 번째 고양이는 강아지와 비슷했다. 사람 먹는 틈에 끼려 하고, 수시로 애교를 부렸다. 물고 할퀴지도 않고 늘 곁에 다가와 주는 친구였다. 그런 친구를 어제 하늘나라로 보내주었다.
남편이고 아이들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리며 새벽까지 함께 했다. 의식을 놓은 눈은 허공을 응시했고 옅게 심장이 뛸 뿐, 어딜 보아도 이미 떠난 듯 보였다. 10살 딸은 왜 우유가, 아직 아기인데 왜, 하면서 목놓아 울었다. 밤늦도록 울어댄 우리들은 아침부터 눈이며 입술이고 할 것 없이 퉁퉁 부어올랐다. 우유는 좋은 곳에 갔을 거야, 더 건강한 고양이로 태어날 거야. 아이들을 토닥인다. 정작 아이들은 시무룩할 뿐인데 말하는 내가 눈물이 흐른다. 아침부터 고양이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함께 모아 태울 요량이다. 아이들이 한 글자씩 눌러쓰는 편지를 곁에서 바라보았다.
정말은 좋은 데로 갔을 거라고 믿는다. 죽음이 나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데려오지 말 걸, 하는 후회도 없다. 다시 반복하더라도, 짧은 동안이더라도 함께 하고 싶다. 타고난 병이라 말해도 꼭 나의 책임인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인 건 별 수 없는 일이다. 목이 멘다. 좀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슬그머니 나타날 것만 같아 집안 구석구석에서 눈물이 터진다.
끝이 다가오면, 마지막을 맞닥뜨리면 온통 회한 투성이다. 오죽하면 누가 미울 때 죽음 앞을 떠올리면 어지간한 원망이 벗겨진단 이야기가 있을까. 정신을 차리려다 울고, 다시 정신을 차리다 운다. 핸드폰을 만지작대며 '죽음'을 검색했다. 죽음을 주제로 강의하는 정현채 교수님의 영상을 보다 각 나라의 장례식을 살핀다. 보드라운 살이 검은흙이 되고 헐렁거리는 수의를 벗겨 앙상한 유골 수습을 하는 행위를 지켜봤다. 2년 전 떠난 삼촌도 꼭 저렇게 검은흙이 되고, 먼지처럼 사라지고 있을까.
정현채 교수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옮겨감이라고 말한다. 본래 영혼에 관심이 많은 내겐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차원을 이동하는 것,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몸을 벗고 훌훌 날아가는 일. 그렇다 해도 갑갑한 육신에 갇혀 있는 나로서는 그저 한계이고, 절망이다. 죽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 말해주는 거라면 모를까. 실은 듣는다 해서 겪지 않고 이해한다는 게 가능하지 않을 터다. 이론으로 자전거를 샅샅이 이해한다 해도 직접 실행하지 않으면 탈 수 없는 것과 같다. 아무리 증거가 명명백백한들, 죽음을 경험하기까지 나는 무엇도 결코 알 수가 없다. 그저 아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