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는 왜 태어난거야?
생生을 대하는 태도
최근 나는 줄리언 반스의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필사하고 있다. 염세적이고 유머스러운 그의 글에서 죽음에 대한 비통함 따위는 찾을 수 없었지만, 실은 그 자체로 두려움에 맞서는 느낌이 들었다. 9살 딸이 내게 한 질문과 줄리언 반스의 책은 삶의 경험치만큼 다른 의미의 물음이었다. 딸은 '태어나면 모두 다 죽는다'라는 전제 하에 질문하지 않았다. 엎어치나 메치나 대답을 하기 어려웠다. 실은 우리는 일상에서도 쉽게 '죽음'에 대해 토론하고 있기에, 그 의미까지 담고 있었는지 모른다.
"글쎄, 우리는 각자 태어난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를 잊은 것 아닐까?"
"태어날 때부터 이유를 알고 태어나면 편할 텐데, 왜 잊어버리는 걸까?"
"편하면 재미없어서? 서연이도 재미없는 거 싫어하잖아."
아이들과 나는 종종 현실을 인생 게임이라고 이야기한다. 죽음이든, 아픔이든 게임이라면 심각해질 이유가 없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그저 그런 태도로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람들 그리고 자연 모두가 하나라는 것 역시 입버릇처럼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이들에게 이 진실은 우리만의 비밀이다. 아이들은 종종 왜 이 비밀을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지 궁금해한다. 그래서 머리로 아는 것과 온 마음으로 아는 것은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아이들은 자신들 역시 이 진실(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과학 교양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는 DNA의 보존, 전달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인간 껍데기이다.(씁쓸한 내용이지만 책의 표현을 가져왔다) 지구 상에 가장 성공한 유전자 전달체인 식물과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은 모로 보나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인간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600만 년 전 침팬지와 같은 유전자에서 만나게 되지만, 침팬지도 결국 태초에 물질 하나로 좁혀진다. RNA 이거나 DNA 이거나. 인간보다 공룡이 먼저였고, 공룡보다 풀이 먼저고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RNA 또는 DNA란다. 지구 상에 모든 동식물의 조상은 하나이다. 단일 민족을 내세우는 대한민국만 봐도,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있다. 중국, 일본, 러시아, 몽골 등 가까운 나라만 넣을 수만도 없다. 심지어 그 동양인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다양한 민족이 섞여 있다. 솔직히 말해, 아버지 성만 따라서 그렇지 어머니 성을 가져오면 결국 하씨건 이 씨 건 김 씨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편 가르고 배척하길 좋아하니 진실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건 곤란하기 짝이 없다. 지구 상에 유일하게 단일종으로 살아가는 생명체가 지금의 인간(호모 사피엔스)이라고 한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호모 사피엔스가 창궐한 지 오래지 않았다. 영속적인 것은 결국 생명의 본질 DNA일 뿐, 인간은 언제든 대체될지 모른다.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세상은 나와 다름없이 하나이다.' '현실은 인생 게임과 같다' 는 건 과학적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음에도 꽤나 설득력이 있다. 물론 내가 보는 타인이, 나무가, 고양이가 나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모든 것이 전부 나임을 '가슴'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생명이 스러질 때까지도 마음 깊이 이해하지 못할지 모른다. 다만 문득 삶의 고통이 이해가지 않을 때,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이 들 때, 업적을 남기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그저 있는 그대로 그럴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되도록 아무렇게나 의미가 없이 살자는 게 아니다. 늘어지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는 순간에도 '함이 없이' 투쟁 없이, 즐기며 살아가면 좋겠다. 사람 앞에서든 세상 앞에서든 태도가 8할이다. 내게도 아이들에게도 오직 그럴 뿐, 삶을 경쟁하고 쟁취해야 하는 무엇으로 오인하지 않길 바란다.
딸의 물음은 실존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이고, 이는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 놓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그리 심각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구름이 낀 날에도, 천둥 번개가 치는 날에도 그 나름의 맛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무력하게 무가치하게 사는 것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외면하는 것과 같다. 반드시 생명이 다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언제나처럼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 '죽지 않는 척' 하며 현재 벌어지는 일들이 세상 가장 중요한 일인 듯 살아가거나. '죽음이 무섭고 싫어서 무섭지 않은 척' 하며 염세주의자가 되어 개판으로 살거나. 이도 저도 '살고 있음'이라고 볼 수 없다. 생명 그 자체로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죽음의 두려움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로 숨 쉬는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고, 살아 있음에 감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