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의도)없음

헌신하는 태도에 대하여

by 하민혜


헌신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함'이다. 유독 희생적 의미를 감추고 있는 어감 때문일지 사람들에게 잘 쓰이진 않는 것 같다. 나는 자리가 어디이든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는 결국 생(生) 하기 위함이지 절멸을 위한 것은 아니다. 때로 흐느적거리며, 있는 것도 아닌 듯 자리를 지키는 사람을 볼 때면 다만 게을러서가 아니라, 생(生) 즉 존재함 그 자체에 사랑이 적어서는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헌신은 반드시 타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기 보단, 그런 태도 자체가 나를 위해서이고 삶을 위해서라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두고 이기적이 아닌 행동이 아니다며 '대단하다' 추켜 세우기도 한다. 나는 이타심과 이기심을 정반대로 놓고 있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소통의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언어는 그저 표기일 뿐,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다는 아니다. 이타심과 이기심을 정반대로 볼 수 없다는 느낌이다.


우리가 말하는 흔히 '이기적인' 사람들은,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자신만 생각한다기 보단,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는 듯 하다.) 인간은 혼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공감이라는 창을 가지고 있다. 우주 한 공간에 오도카니 혼자 행복하면 행복한 게 아니라, 동물이든, 사람이든, 식물이든 상대를 필요로 한다.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 자신을 제대로 사랑한다면, 타인의 고통 역시 불편해하는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불편하고 불행한 모습을 보며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의 범위가 다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말하는)이기적이다는 이들이 자행할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타인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득을 취하는 이들이 내눈엔 가엾게 보이기까지 한다. 마음의 소리는 언어가 아니고 아주 고요하게 느껴지는 느낌과 같기에, 우리는 쉽게 마음을 내버리는 선택을 한다. 이는 비단 이기심과 관련해서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직업을 선택할 때, 언짢은 마음과 달리 머리로 결정을 내리고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일을 선택하기 쉽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 일은 어떤 식으로 건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제대로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다면, 분명 그 사람만의 독특성이 생겨나고 그이는 저절로 빛이 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 독특성은 우리 일반적인 사람들 기준에 이타적이거나 헌신적으로 비칠 수 있지 않을까.


맡은 바에 (눈에 보이는 이득과 상관없이) 혼신을 다하는 사람, 그러니까 일절 손익과 관계없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헌신하는 사람 그리고 이타적인 사람이라 하는지 모른다. 또 타인이나 (넓은 의미로 세상일 수도) 내가 아닌 누군가(무엇인가)를 위하는 사람들 또한 포함한다. 이는 스스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누구에게나 저절로 일어날 행동이 아닐까 감히 짐작해 본다. 그 마음의 소리를 누군가는 양심, 혹은 신성성, 9번째 지능이라고 부른다.

만일 마음의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라, 그저 존경받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 '이타적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지어내는 행동은 어떨까? 적어도 구세주가 아닌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이런 경험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럴 때야말로 우리는, '억울함'을 느끼지 않나 싶다. 그러니까 지어내는 행동일 때. (극단적으로 '위선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목적이 있는 행동'일 경우를 이야기한다. 그것이 타인의 행복이건, 그로부터의 인정이건, 내가 무언가 목적을 둔다면 그 헌신을 (목적의 성취 없이) 지속할 힘이 부족해진다. 그 행동은 상대의 반응에 맞춰 또는 세상의 반응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헌신을 이야기할 때, 보통 '엄마'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나는 내가 엄마가 되고서야, 대부분의 헌신마저 '눈치'임을 알 수 있었다. 자녀가 행복하길 바라고, 안전하길 바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본능일 것이다. 하지만 그걸 넘어서서, 자녀를 바르게 키우고자 하는 이유가 '자녀를 제대로 키운 엄마'로 보이고 싶은 마음과 '실패한 자녀를 둔 엄마로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진정한 헌신의 마음을 쓸 때에는, 무엇도 바라지 않는 마음이어야 한다. 상대의 반응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헌신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세상을(자녀를) 변화시키는 사랑의 힘이라 생각한다. 무엇을 얻지 못해도 헌신할 수 있는 힘은 기필코 내면에서 나온다. 억지 희생을 지속하기 어렵고, 만일 어거지로 지속했다간 원하는 결과가 아닐 때 지쳐 낙담하는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결과가 나타나더라도 목적이 있는 헌신은, 보상 심리가 발동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를 위한다는 마음에 물론 선함이 느껴지지만, 그로 억울함을 가진 이들을 만나면 기필코 묻고 싶은 게 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나요?(억지로 움직이게 했나요?)" 엄마로서, 직원으로서, 친구로서, 국민으로서 '나의 헌신'에 대한 억울함은 당연하지 않다. 그 억울함이 바로 내가 무언가를 바랐다는 증거이다. 또한 무언가를 바라고 사는 것이 대다수의 인생 아닌가? (어떤 결과를)바라는 마음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일편 헌신으로 인해 바라는 것이 상대의 행복일지라도, 목적이 선하냐 선하지 않느냐를 따져 묻는 것도 아니다. 다만 실컷 헌신해 놓고 헌신짝이 되는 사람들이 안타까워 하는 이야기인지 모른다.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든, 상대를 위해서든, 뭔가를 '위해서' 헌신했다면, 못내 억울함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역사에 길이 남은 헌신은 일말의 억울함이 없다. 일상적으로 스스로 하고 있는 '헌신'은 행여 눈치를 보거나, 억울함이 묻은 행동은 아닐까.
사실 이런 헌신은 하나 안 하나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억울할 것 같다면 차라리 안 했으면 좋겠다. 헌신하기 위해 헌신하기보단,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손해, 실패, 피해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만일 희생이든 노력이든 그 목적이 긍정의 무엇이다 할지라도 어떤 결과를 위한 수단이 아니어야 한다. 행동하는 그 자체에(지금 현재에) 이미 마음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결과와 상관 없을때야말로, 진정한 헌신의 힘이 빛을 발하지 않겠는가.

내치고 따져 묻는 친구가 바쁜 중이라, 그새를 못참고 글을 담는다. 욕을 바가지로 할지 모르는 단상인데, 부디 한 인간의 개똥철학일 뿐, 정답이 아님을 이해하시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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