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개

춤을 춘다

by 하민혜

한 명도 나를 몰랐으면 하고, 모두가 나를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생에 삶과 죽음이 하나이듯, 사랑하는 만큼 미워하듯. 양가적인 감정은 하나라고 봐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인스타를 시작한 지 오래진 않았지만, 꾸준히 글로 소통하며 사람들과 이야길 나누고 있다. 그 와중에 유뷰브도 배워보고(최근) 어젠 사회적 독서 방안을 위한 토론회에 다녀왔다. 대부분 초대이거나,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경우인데 SNS로 연결된 인연이 많다. 일련의 활동은 나름의 목적이 있대도 결국 몸을 움직이고 입을 여는 건 나를 알리는 효과가 있다. 얼굴을 드러내고 끄적인 글이 만날 드러나는 것은, 작으나마 세상에 발자국을 남기는 셈이다. 이 모든 활동은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함을 말하고 싶은 본능인 걸까.


운전을 좋아한다. 문득 토론회가 끝난 후 돌아가는 길에 넋을 놓고 발을 까딱거리는 나를 관찰했다. 운전을 내가 하는 듯도 하지만 발은 절로 움직이고, 묵묵히 핸들을 돌리는 모양이다. 퇴근 시간이 겹쳐 30분 거리를 1시간 남짓 운전해야 했다. 토론회는 즐거웠다. 왠지 몰라도 긴장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막상 마이크를 들고 말할 적엔 가느다랗게 목소리가 떨리는 걸 느꼈다. 늘 그렇듯 혀끝에 숨이 모자라 잠시 마이크를 떼기도 했다. 함께 하는 분들의 발표를 듣는 일은 더없이 흐뭇하고, 질투가 나기도 했다. 내 것이랄 게 없는 세상에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은 마음과, 누구보다 드러나고 싶은 마음이 삐죽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누군가는 SNS를 하는 이들을 두고 관종이라고 표현한다. 스스로가 관종이라고 말하는 이들조차 실은, 때로 지나는 길에 우연한 돌처럼 무심한 시선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대체로 나는 관종과는 반대의 삶을 살려고 애써왔지만, 이런 나조차 관심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역력한 때가 있다.


남편은 일절 SNS를 하지 않는다.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는다. 사회에서 보나, 가족의 입장으로 보나 관종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피해받는 일을 극도로 경멸한다. 여성이 브래지어를 입지 않는 일조차 지극히 이기적이라며 비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는 관심받기를 거절하고, 거부하는 사람인가. 집에서조차 남편은 방구석에 들어가 있기를 환영한다. 말 없는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소란스럽지 않고 가만 입을 다물고 있는 때가 많다. 나는 가족들이 그에게 다가서기를 바라는 걸 느낀다. 그는 사람들이 그를 원하고 찾기를 바란다. 먼저 다가서지 않는 건 피해가 되는 게 싫어서다. 미움받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폭풍보다 크게 그를 덮친다. 거절당하느니, 거절할지 모를 일에 시도조차 않는 거다. 그는 예상대로 연애 경험이 매우 적다.


옳고 그른 건 없다. 자신이 편안한 쪽을 선택하는 게 삶이니까. 애당초 맞고 틀린 게 없다는 건, 잘하고 못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저 스스로가 한 편을 취한 것뿐이다. 부창부수라는 말이 있다. 남편보다야 드러내놓는 생활을 하는 나조차(브래지어를 벗고 다니는 여자를 힐난하지 않는 나는) 그럼에도 분명 그와 닮은 구석이 있다. 누군들 내게 가져다 붙이면 실은, 기어코 닮은 점을 찾는 편이다. 오래전 수감된 이들을 만난 적이 있고,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이들과 상담을 하면서도 나는, 그들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도리어 닮은 점이 많다는 걸 알아차리곤 했으니까.


새벽 명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도리질을 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겠다는 건지를 도통 모르겠는 거다. 어쩌자는 건데. 실컷 드러내놓고 남의 옷을 입은 양 불편한 거다. 숨어 있으면 숨어있다고 불안해한다. 얼마 전 책과 강연에서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들고 독서 모임을 가졌더랬다. 문득 주인공 뫼르소의 독백 중 한 구절이 생각난다.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으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이방인> 알베르 까뮈






아 내가 갖고 싶은 건 내일이 아님을 알겠다. 그저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을 여미지 못해 틈이 벌어지고 의심과 회한이 스미는 거였다. 내가 일어나는 시간은 4시에서 5시 반 사이 어디쯤이다. 눈이 떠지는 대로 몸을 일으키는데 5시 10분 내외일 적이 많다. 명상하고 요가를 하면 아침 6시가 넘나 든다. 책상에 다가가 노트북을 켠다. 이전엔 공책에 휘갈겼는데, 지금은 노트북을 켜고 브런치에 한바탕 목적 없이 쏟아붓고 글은 비공개로 저장한다. 오늘은 이 목적 없고 다듬지 않은 글을 괜히 공개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7시에 다가서면 아침 편지를 작성한다. 언제 어느 즘부터 지속하고 있는데, 한 명이 기다린대도 몫을 다해야 겠지만 최소 댓글이 40개는 거뜬하다. 묵묵히 매일의 약속처럼 편지를 써 내려간다. 목요일이다. 부산스럽지 않게 오늘도 아이들의 즐거운 여름 방학날을 함께하고 싶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마저 읽고, 원고를 고친 만큼 출력해서 다시 읽어봐야 겠다.


이랬다 저랬다 춤을 추는 감정을 따라가지 않으련다. 나는 너를 취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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