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수가 적다. 방방 솟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과는 정반대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날아오르는 기운과 차분히 내려앉는 기운끼리 모종의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진 게 아닐까 상상해 본다. 오늘 새벽 5시부터 아침 10시까지 독서 모임이 있었다. 쉴 새 없이 말을 붙이는 아이들 앞에 이제 나는 듣고도 입을 다문다. 한도를 넘는 말들이 남김없이 꺼내졌기 때문이리라.
앞에 한 시간 반은 영화 상영이라 늘어져 있어도 되었다. 하지만 방구석에 홀로 펼친 영화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거다. 문득, 누구와 함께이든 혼자인 것처럼 느낄 방도는 없는가를 고민한다. 쵸코 파이 하나 뜯는 소리가 다른 분에게 거슬릴까 싶어 조심스럽다. 핸드폰을 들었다 내려놓는 손길이 무겁다. 짧고 굵직했던 <이방인> 영화를 뒤로, 책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하나 둘, 개인적인 서사며 감정들이 대수롭지 않은 양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처음 본 사람, 두 번, 세 번을 넘게 만난 사람도 있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뫼르소'의 사형보다야 나은 상황임이 분명했고, 그의 끔찍한 일도(一道) 앞에 개인의 서사는 가벼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까뮈가 말하려던 게 그런 거였던 듯도 싶다. 허우적대는 나의 상황, 가치, 감정적 반응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고. 사랑하는지 마는지를 판단하고, 결혼이 중요하니 마니를 설파하는 건 죽음 앞에 서면 정말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책은 분명 '허무'를 말하지만 그에 그치지 않는 핵심을 암시하고 있다. 삶이 쓸모없다는 게 아니라, 어쩌면 중요하지도 않은 곳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돌리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어떤 사람은 젊은이가 읽으면 안 되는 책, 자살 기도를 유도하는 책이라 평하기도 했다. 그건 마치 다윈의 진화론이나,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오래간 침울했다는 사람과 결이 같아 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침팬지를 조상으로 삼는 게 우울하고, 유전자를 퍼뜨리는 기계로서 존재하는 데에 분통이 터지는 까닭일 터다.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관점이다. 침팬지가 기분 나빠할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지를 묻고 싶다. 더욱이 죽음이 나쁜 일인지, 좋은 일인지를 과연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이 진실을 부정하려 애쓰는 일은 오랜 전부터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신이 사람을 빚었고,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 믿던 시절엔 그 외를 말하는 이들을 단죄하고 처형하기까지 했다. 암묵적으로 입을 다물게 만드는 사회는 두려움에 가득 차 있다. 실제론 인간이 한낱 먼지와 다를 바 없으며, 자연이 생성하고 소멸하듯 인간 역시 그러할 뿐이란 진실을 덮으려다 실패하고 분노한다. 나로서는 도리어 진실에 다가갈수록 세상이 칼라풀하게 선명해지는 기분이다. 만일 내가 태어난 의미가 있고, 그걸 반드시 찾아야 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맞이할 테고 죽음 후에 심판이 있다면, 아 이보다 더 피곤한 결말이 있을까. 꼭 그렇게 긴장하고 바짝 곤두서서 살아야만 하는 걸까. 죽음이 있기에 삶은 허무한 게 아니라, 기한이 있어 더없이 즐길 시간이라 느낄 수 있다. 무한정 살아지는 생이라면 지긋하다 못해, 개판이 될 듯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까뮈는 뫼르소처럼 모든 걸 빼앗긴 채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삶과 우리의 삶이 다를 게 없음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랑, 믿음, 소망, 자유 따위가 실은 특정 장소가 아닌 언제나 내게 있으며, 또한 실체가 없기에 있지 않은 것과도 같다고. 그건 마치 흘러가는 물을 손에 움켜쥐려고 애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거다. 까뮈는 중요한 건 지금 바로 여기, 한 인간으로서의 의지 표명이 아닐까를 말한다. 다음 생이나 천국과 지옥, 감옥 밖에 있는 자유나 소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로서 살아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존재의 의미이자, 그 외에 어떤 가치나 신념도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누군가를 보며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던 나의 오만함에 대해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또 남을 향한 삿대질은 곧장 나를 향해 있음을 퍼뜩 알아차린다. 나는 나 자신을 늘 심판대에 올려놓고 있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좋고 나쁨에 대한 생각은 과연 나만의 것이 아닌, 옮아가고 닮아온 무엇이지, 진실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허상을 좇느라 본질을 놓치고 싶지 않다. 끌려가듯 살지 않고, 삶을 끌고 가고 싶다. 우리는 이미, 어쩌면 누구나, 각자의 세상에서 '이방인'으로 존재한다. 태어날 때, 그리고 죽을 때에도 실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 나의 존재값이다. 진실을 부정하고 허울 좋은 그림을 좇는 사람과, 진실을 받아들이고 용기 있게 자신의 존재로 살아가는 이가 있을 터다. 죽음 앞에 다시 한번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솟는 뫼르소에게, 영원 회귀로 다시 한번 삶이 주어지기를. 책을 덮으며 20년이든 100년이든 짧고도 아름다운 삶을 나는 정말은, 그저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