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준비에 한창인 아침, 머리를 감고 말리고 있었다.
화장대 거울 속에서 우리 집 고양이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고양이는 이상한 사건을 목격한 것 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쿡쿡 거리며 웃음이 났다. 드라이기 소리를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매번 생경스럽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뜨기 때문이다.
별로 볼 게 없어 이내 가늘게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힌다.
불쑥 너에게도 나에게도 털이 있구나 싶다. 하루가 멀다 하고 머리털을 물로 씻고, 말리고, 화장대 앞에서 부산을 떠는 나의 행동이 새삼 기묘하게 느껴졌다. 인간으로 나서 세상을 살기로 결정한 이상,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이 수만 가지는 늘어난다. 고양이와 나는 함께 어우러져 살지만 분명 그와 내가 느끼는 인생의 맛이 다른 것이다.
고양이는 자신이 예쁜 고양이인지 아닌지, 배가 나왔는지 나오지 않았는지, 왜 자신이 이 집에 살고 있는지, 일절 관심이 없다. 눕고 싶으면 눕고, 배가 나오면 나오는 대로 놔두고, 걷고 싶으면 걷는다. 건강을 염려하거나, 자기 모습을 누가 어떻게 볼지 걱정하지 않고 다른 고양이와 비교하지도 않는다.
나는 명상을 하기도 하고, 마음공부에 관심이 많다. 결국 이루고자 하는 평화로운 마음이 우리 집 고양이와 다르지 않음을 고백한다. 자연은 본래, 깨달음과 가까운 영역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남과 비교하고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사사로운 오만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네 삶이 고(苦)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불교에는 사람이 화택(火宅)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명백하게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그래 보이지 않는 이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도 벌어진다. 상황으로 주어지는 고통보다는, 생각으로 말미암은 고통이 크다는 것을 반추할 수 있다. 또, 내가 느끼는 고통은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전쟁이 벌어지고 끔찍한 자연재해 앞에서도, 자신의 괴로움을 더 크게 느끼는 게 사람이다.
단순히 이야기해서, 고통이 발가락에서 시작되었는데 엉뚱하게 손가락만 바라보는 일이 많다. 생각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외부에서 해결하려고 하니 해결이 될 리가 없다. 시작점이 생각이라면, 그 끝 역시 생각이다. 더 좋은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생각, 더 예쁘고 싶다는 생각, 더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 더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 그 생각에서부터 괴로움이 시작되니 그 생각에서 괴로움을 끝낼 수 있다는 뜻이다.
마음공부를 하며 다가가고자 하는 그림이 때로 무위, 무욕, 무취 등 무(無) 일 때, 과연 이것인가? 나는 나무가 되고 싶고, 바람이 되고 싶은 건가? 고민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우리 집 고양이가 되고 싶진 않다. 고양이가 부럽지 않은 이유는 피곤하고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는 만큼, 그가 느끼는 삶의 맛은 단순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없이 낮아지고, 작아지는 느낌 덕에 때로는 높이 있고 성장하는 느낌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남들보다 내가 못나고 부족해서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느낌을 알기에 인정받고 사랑받는다는 게 어떤 맛인지를 알 수 있다. 몸이 아플까 염려하고, 나이 듦을 두려워하며, 죽음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은 건강을 감사하고, 현재를 알아차리며, 살아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 집 고양이는, 별 고민 없이, 살아있음을 감사하거나 비통해하는 일 없이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처절하게 고민하며 때로는 절망하고 좌절도 겪으며, 그렇게 살아간다. 부디 두 눈 질끈 감고 힘겹게 살기보다는, 모든 맛들을, 성공과 실패를, 미움과 사랑 그 모든 느낌들을 두 눈 크게 뜨고 감각할 수 있기를. 그게 내가 이 삶을 선택한 이유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