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는 좋겠다. 학교도 안 가고"
딸아이의 친구가 말했다. 루나는 신세 좋은 고양이다. 이 집 아이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학교 다니는 게 싫다는 건가,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매일 나가야 하는 직장처럼, 아이들에게 학교는 같은 맥락인 셈이니까. 정작 학교 생활을 즐기는 줄도 알아 염려되지 않는다. 아이들 먹을 만두를 준비하며 그 말이 내내 맴돌았을 뿐이다. 매일 나가던 직장을 그만둬설까. 1년이 넘은 것 같다. 어느 날 남편에게 선언했다.
"나 당분간은 경제 활동을 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생각해?" 꼬박 6년을 영업 사원으로 살았다. 사무치게 고단한 일임을 말해 뭐 할까. 내성적인 성향이라면 쓰고 있는 가면에 질식할만한 세월이다. 타고나길 뭐든 내색하지 않는다. 귀가 어둔 엄마 밑에 자라 더하면 더했지, 엄살이 없다. 죽을 쑤고 썩어놔도 삼키면 그만이었다. 감추고 가리는 데 도가 텄달까.
일의 결과를 말하자면 그럭저럭 해냈다고 본다. 특유의 성실함 덕이다. 아니면 고통을 감내할 줄 아는 면이 한몫했을지 모른다. 살을 찢듯 영역을 넓혔고 소장에 임하며는 정성을 다했다. 나만의 감평이 아니라, 통장에 찍힌 숫자가 그랬다. 어렵사리 앉은자리를 털푸덕, 내려놓을 때 지점장이 나를 불렀다. 다른 소장님도, 친구나 가족들도 비스무레한 소리를 했다. "지금까지 해 놓은 게 아깝지 않아요?" 난생처음 하는 일에 부딪히고 크게 자리 잡은 경험이, 회사를 그만둔다고 버려질까. 답은 한결같았다. 조금도 아까울 게 없다는 거였다.
회사 입장에야 휙 하고 돌아서는 느낌으로 서운했을 걸 안다. 마음먹은 일을 곧장 실행하는 나로서는 별 수 없는 일이다. 미적대고 엉기적거리는 걸 못한다. 고민을 길게 하지 않는다. 내성적이라고 해서 실행력이 떨어진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해야 할 이유가 생긴 뒤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좋은 결과만 있던 게 아니라도 후회는 없다. 탓할 대상이 없어서다.
단지 고양이처럼 "회사를 안 가고"싶었던 건 아니라고. 자문자답이라도 했던 걸까. 아이의 말이 귓가에서 너는 좋겠다,라고 들렸던 것도 같다. 언짢다기보단 아하, 하는 느낌이면 딱 맞다. 어쩌면 나는 단순하게 '살아야만'하는 삶을 버리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엄마니까 밥을 하지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렸다. (그렇다고 밥을 안한다는 건 아니다.) 회사를 매일이고 꼭 '나가야 하는' 것도 버렸다. 억지로 인맥을 만들거나 관리하는 걸 버렸다. 삶의 의무 아닌 의무를 몽땅 내버리기로 작정했을 때, 먼저 '돈'에 대해 성찰했다. 돈을 '벌어야만'하는 게 진실인지를 따져 물었다.
나의 삶은 돈을 벌고, 능률을 올려 더 많은 돈을 버는 시스템에 익숙했다. 문제와 목표를 나누고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열심히 사는 나를 예쁘게 보는 이가 많았다. 나라고 다를까. 턱없이 늘어져 있거나 우울한 친구보다야 목표를 만들고 헤쳐나가는 사람을 보는 편이 유쾌하다. 단지 박수 갈채를 받는다 해도, 남 보기 좋은 삶에 뚜렷한 가치관이 없다면 정작 주인공은 즐겁지 않은 수가 있다. 내가 그랬다. 어떤 삶을 원한다,가 먼저가 아니었다. 어려서 배운 대로,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돈을 잘 벌면 그만이었다.
재차 강조하지만 나쁘단 건 아니다. 그대로 나는 수완 좋은 자산가가 될 수도 있을 터다. 아이로 말하자면 순차적으로 열을 내고 대학까지 졸업하는 거다. 어른이 말하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꽤나 좋은 성적을 낸다. 치열하게 고민할 필요 없이 칭찬하는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옳고 그름을 논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회사를 내팽개치는 일에 어디까지나 삶의 주도권을 찾으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가난해지는 게 나쁘다는 건 누가 심어준 생각인가를 의심했다. 돈이 없어도 있어 보이는 사람이 있다. 삶을 대하는 태도에 여유가 묻어 있어서다. 실제 얼마가 있고 없고가 더 중요하다 말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설 수 있다. 그치만 우리는 진실을 알고 있다.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쫓기듯 사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돈이 적더라도 여유로운 삶이 백 번은 낫다고 본다.
살 걸 못 사고, 못 먹는다는 게 최악인 건가? 딱히 사고 싶은 것도 없는 걸. 먹는 것도 김치 하나면 되는 걸. 남편이 농담섞인 말로 내게 쌀은 어떡할 거냐 물었다. 아무렴 나 먹을 쌀 조금 못 구할까. 시골까지 내려가거든 농사를 짓겠다 말했다. 구걸하는 지경까지 손가락만 빨진 않겠지. 검소하게 살아도 충분하단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사교육비를 운운한다면 나로서는 책 한권을 쓸 작정이다. 암만 돈이 많아도 경험에 썼지, 학원으로 아이들을 돌리진 않았다. 배우고 싶다면 얼마든지 보낼 마음이지만 초등학생 아이들은 엄마와 책 읽고 글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단 생각이다. 나처럼 아이를 '제대로' 방목한다면 학원을 가고 싶다 말하지 않는다. 적어도 학원비때문에 굶을 일은 없다.
했더니 이번은, 어려운 가족을 못 도와주면 어쩌냐 물었다. 가족을 '돈'으로 도와주면 정말 득이 될지, 해가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여유가 있다면 도와주고, 아니면 말 일이지. 또 뭐가 있을까. 병원비? 아이들 실손 보험은 둘이 합쳐 1만 원 내외다. 병원비의 대부분은 실비에서 나오니 걱정할 지경은 아니다.
다 쓰기엔 길고 지루하다. 생략할 셈이지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충분히 그려봤다는 이야기다. 그 최악이 결코 최악이 아니었다는 것만 발견했다고 말해도 될까. 최악은 어디까지나 오늘 내가 죽는 거니까.
어느 순간부턴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는 욕심도 내려놨다. 나와 나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면 딱 알맞다. 아침 새벽이면 명상하고 요가하며 아침을 맞는다. 떠오르는 대로 편지를 써서 SNS에 글을 공유한다. 일이 들어오면 오는 대로, 말면 마는 대로. 승낙도 하고 거절도 하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마음껏 게으르기도 해 본다. 무엇보다 글을 읽고 쓰는 데 많은시간을 허락한다. 나의 기쁨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서다.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이다.
거리감이 줄었다. 맹목적으로 사회의 기준에 맞추려 했던 지난날이 애틋하다. 늦지 않아 다행이다. 이런 생활의 기한을 언제까지라고 정해놓지 않았다. 내킬 때까지 삶을 주물럭거릴 작정이다. 집이 점점 더 외곽으로 쫓겨난대도. 덜 사고, 덜 먹는 삶이 서럽지 않다. 주도권이 없을 때와 다르게 하루하루가 마음에 든다. 이유 없이 설렐 때가 많다. 긴 휴가라고 해도 좋다. 마음이 동하면 돈 버는 일에 매달릴 수도 있겠다만.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만이 존재할 거라는 걸 안다. 여행자처럼 살고 싶다. 가볍게, 자유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