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게 잔상이 남네요. 광기 어린 집착의 끝은 결국 자살이나 타살인가요. 사랑으로 울고 웃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니. 세기의 사랑인 로미오와 줄리엣이 떠오릅니다. 죽음으로 사랑을 증명하겠다는 건데요. 어릴 적엔 죽음을 불사하는 사랑에 냉소적이었습니다. 슬프기보단 미친 것들, 하는 정도로요. 이제야 집착에 대한 남다른 의견이 생겼어요. 동정심이 일어요.
불구 소녀인 '에디트'는 손목을 두 번 그은 후예요. 그런 자기를 연민하는 '호프 밀러'에게 사랑을 느낍니다. 그는 에디트의 사랑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요. 그녀의 마음을 알았을 땐 두려움과 혐오가 치솟습니다. 뜬금없는 상대로부터의 집착(?)을 만날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죠. 하필 상대가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점이 한몫했을까요? 가여운 한 여자의 사랑마저 '불구'로 만드는 데에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떠올랐어요. 상대의 집착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인데요.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두는 거라면 감옥이잖아요. 탈옥을 꿈꾸고 기대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에디트가 호프 밀러에게 가진 건 분명 이성을 향한 사랑입니다. 죽음으로 이끈 감정이 사랑일까, 저로서는 사랑을 핑계로 자살했다고 봐요. 자존심이 강하고 예민한 여성으로 드러나는데요. 두 다리를 꼼짝하지 못 해 동정받는 스스로를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나타나기 전에도 자살을 했더랬지만 실패했고, 이번은 성공한 셈이죠.
자기 자신을 견딜 수 없는 이가 타인을 견딜 수 있을까요? 어떻든 사랑 끝에 죽음이 드러나는 스토리가 많은 건 우연은 아닐 겁니다. 삶에 사랑이 전부라는 방증이에요. 대상에 따라 사랑을 얻고 잃는 것 같지만. 정말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잃으면 살 수 없어요.
도스토옙스키 <백치, 상>을 읽고 독서 모임을 가졌죠. 백치의 주인공인 미쉬 낀 공작이 품은 연민에 대한 토론이 있었어요. 연민을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까? 상대가 '불쌍해서' 함께라면 이미 슬픈걸요. '불쌍하다'는 마음으로 사랑을 말할 수 없죠. 적어도 '남녀'간의 사랑에 '연민'이 주라면 서로가 불행한 것 같아요.
예전에 저라면, 질투나 집착(두려움)은 사랑이 아니다고 단호하게 말했을 겁니다. 지금으로선 모든 게 사랑이라는 걸 알아요. 모든 감정이 사랑에 들어 있는 거죠. 어쩌면 서로를 파괴하는 '동정심'조차, 사랑의 한 면이라고 보입니다.
<초조한 마음>에서 호프 밀러의 연민이 절정에 달해 에디트와 약혼하는 장면이 있어요. 모두가 감격에 겨워하고 기쁨에 들뜬 모습입니다.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자신이 '신'이라고 여기는데요. 스스로 창조한 '환희'에 감화해요. 만감이 교차하는 장면이었어요. 과연 연민이나 동정심은 누굴 위한 걸까 싶죠. 삶을 창조하며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신의 손길,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반응하는 사람들, 변화하는 사람을 보는 건 그야말로 날것의 기쁨일 테고요.
개인적으론 에디트와 호프 밀러가 결혼했더라도 괜찮았을 것 같아요. 결혼 생활에, 갈망하는 열정과 존경만이 합당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흔히 '건강하지 못한' 관계라고 표현하는데요. 에디트의 집착 역시 마냥 아파 보였어요. 중요한 건 연민이든, 갈망이든. 자기감정에 책임지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감정인 양 포장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겠죠.
마지막에 호프 밀러가 '연민'으로 그녀와 함께하겠다고 마음먹는 데다. 솔직하게 밝히겠다고 말하는데요. 에디트의 목숨이 끊어진 건, 냉정하게 말해 그녀 자신이 자기를 혐오하는 까닭이 아닐까요. 그의 연민때문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가슴 아픈 스토린데요. 사랑의 한 면이 연민이라면, 연민을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파도를 보고 바다가 아니라는 것과 다르지 않은 느낌입니다.
어떤 사랑은 갈망이 크기도 하고, 어떤 경우 연민이 클 겁니다. 어떤 관계에선 존경심이 크고, 어떤 이들은 믿음이 주인지도 모르죠. 어떤 사랑이 옳고 그르다고 하는 선을 넘어선 느낌이에요.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다른 평이 나왔을 겁니다. 연민을 휘두르는 호프 밀러를 욕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문득 그간 나의 사랑은 어떤 면을 드러냈나, 돌아볼 수 있었고요. 특별히 연민을 세워놓고 마주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영화로 만들어져도 좋을 것 같아요. 세밀한 감정 묘사가 인상 깊게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