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뒤로

나와 상담 중입니다.

by 하민혜

영업직에 있다 보니 상품 이야기를 주로 할 듯 하지만, 상담 중 대부분이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부부 상담, 자녀 상담, 가정 경제, 부모와의 문제, 진학, 취직, 이사 등 다양한 고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때로는 어느 쪽으로도 전문가가 아닌 내게 이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분명 누군가는 사람 상대하는 일이 다 그렇다며, 삶의 노고를 토로하는 이들을 '그런' 사람 취급하기도 할 것이다. 정작 오래간 일대일 상담을 하며 느낀 은 '그럴 사람'과 '그러지 않을 사람'은 나눠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 누구에게도 결코 털어놓지 않은 비밀을 꺼내 놓는 이들은, 누가 보아도 '그러지 않을 사람'측에 속할 테니 말이다.


의사나 변호사 혹은 전문 상담가를 찾아가 해결책을 듣지 않고, 한낱 영업 사원에게 속사정을 털어놓는 이유가 무엇일까? 대체로 복잡한 삶의 문제에 해결책이라는 게 애초에 존재하질 않아서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더 근사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모든 문제와 해결 방법이 외부에 있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관계없으니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는 이에게 털어놓는 것으로 사실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하게 된다. 마치 내게 이야기를 쏟아내는 듯 하지만 실은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는 셈이다.




나는 딸과 아들을 키우고 있다. 다행일지 아들은 그렇지 않은데 딸은 엄살이 심한 편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아파도 아프다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기에 그런 딸의 엄살이 보기 싫을 때가 많았다. 거꾸로 생각해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니, 어린 딸의 엄살이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어릴 적부터 나는 엄한 어른들 손에 자랐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엄마와 함께라 엄살을 부리려야 부릴 수 없기도 했다. 특별한 사건은 조금도 기억에 없지만 어린 날 중에 상처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파도 속상해도 속 깊은 말을 쉽게 꺼내놓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굳이 어릴 적 상황을 운운하는 이유는 피해의식을 가져서가 아니다. 단지 엄살을 부리는 사랑스러운 딸의 모습이, 괜스레 밉다는 이 마음이 수상쩍기 때문이다. 원치 않는 둘째 딸로 태어난 나는 아래에 귀한 장남인 동생이 있다. 오해할까 이야기를 하자면 보통 남매 관계에 비해 사이가 좋고 우애가 깊다. 아무리 사랑해도 전부 마음에 들 수 없으니 흉을 보자면, 동생 역시 어릴 적부터 엄살이 심한 편이다. 가만 보면 마음 어딘가에서 엄살을 부리는 것을 사랑받으려 노력하는 모습으로 오해하는 듯하다. 아픈 것을 위로받고 싶을 뿐인데, 이렇게나 베베 꼬여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9살 딸과 나는 이따금 서로 인상을 찌푸린다. 유별날 것은 없고 흔한 부모 자식의 풍경이다. 엄마는 혼내고, 아이는 반항하는 일이다. 부지런히 마음에 귀를 기울이니, 딸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였다.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자동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생각이 바로 문제의 원인이었다. 그러니 해결방법 역시 내게 있었다. 아이 말투가, 인성이, 학습이, 예절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내 생각, 그 생각을 만나기 위해선 감정을 알아차리는 일이 필요했다. 딸의 엄살이 못마땅하듯 감정이 올라올 때가 바로 그 기회인 것이다. 깊이 묻혀있는 사건 사고들을 꺼낼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최소한 감정에 따라오는 구더기들을 만날 수는 있다.


'서연이는 왜 이렇게 엄살을 부리지?'


'응? 내가 지금 언짢아하고 있네. 엄살 부리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가.'


여기까지만 하면 된다. 마음을 취조하고 심문할 필요는 없다. 스스로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된다. 보통 사람이 가진 관념은 상처와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다만 그 마음을 알아차리기만 해도 조금씩 감정과 생각이 녹는다. 물론, 한 번 마주한다 해서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오래간 묻어두었을수록 여러 번의 알아차림을 해야만 변화가 일어난다.


살다 보면 아플 때에 아프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엄살도 서로에게 덕이 되는 일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수시로 언짢은 감정을 알아차리자 나의 표정과 말투가 저절로 부드러워졌다. 딸의 엄살은 한동안 계속되며 이따금은 나를 시험에 들게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알아차림 없이도 언짢은 감정이 들지 않게 되었다. 마치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는 듯 풀리지 않는 문제는 스르르 해결이 된다. 슬쩍 팔꿈치로 치기만 해도 지칠 때까지 그 아픔을 얼러주어야 하는 날들이 줄어들었다.

사소한 일례를 들었지만 내면을 알아차리는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가를 말하고 싶다. 조금만 뒤로 물러서서 자신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 속 심각한 일들을 재미있게 바라보는 것처럼 삶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다. 자신과의 대화를 위해 나를 빌어 상담을 하는 이들 역시 그 진실을 알면서도 잊었을 뿐이다. 어떤 문제든 외부에서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판단을 내는 상담보다는 문득 자신과 대화하듯 그저 쏟아내고 알아차리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는 본연의 문제를 풀어갈 지혜와 힘을 스스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목숨을 바치라면 내놓을 만큼 사랑하는 딸과 아들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삶은 모두 스스로가 살아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그저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는 것을 가슴 깊이 받아들인다. 문제를 문제로 바라보는 나를 알아차리고 깨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이 순간은 언제나 편안하다는 진실 눈을 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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