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의 시선

상처

by 하민혜


10살이 되던 해에 난생처음 전학을 갔다.

어느 골목을 걸어도 나를 알고, 이웃과 가족처럼 지내던 시골 마을에 살던 나였다. 자녀 교육을 생각해 도심으로 나가기로 결정하셨던 당시 부모님의 뜻을 이제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겨우 반 친구가 누구인지 정도를 구분해낼 만큼 사람이 바글거리는 학교로 옮겨 갔다.

생각만큼 낯설고 어렵진 않았다. 사람을 좋아했고, 사람에게 데어본 일이 없는 아이라 세상 밝고 유난스러웠기 때문이다. 열 살의 나는 투명한 햇살처럼 그저 맑았다. 으리으리한 학교도, 복작거리는 교실도 내겐 설렘이었다. 시골과 다른 모든 요소들이 좋았다. 예쁘게 정돈한 머리카락에 캐릭터 삔을 꽂은 아이들도 신기했다. 나에겐 당최 없던 모습이라, 그런 아이들 곁에 함께 있는 게 좋았다.

반에 유독 이쁘장한 아이 둘이 있었다. 얼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습이 그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을 하고, 미니 마우스 가방이며, 단정한 신발이 눈에 띄는 아이들이었다. 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둘과 친해졌다.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내게 먼저 말을 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둘은 단짝이라고 서로를 소개했다. 세련된 아이 둘과 촌스러운 나는 세상 다정한 삼총사가 되었다.


하루는 학교가 끝난 후, 그 친구 집엘 놀러 가게 되었다. 둘 중 조금 더 학급 아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아이의 집이었다. 들어서부터 거나한 집에, 살며 처음 보는 듯한 온갖 장난감들이 가득한 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가 죽을 법도 했지만, 아마 그런 마음보다는 부러운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날따라 예쁜 그 아이가 더욱 예뻐 보였다.

또 다른 친구 하나와 나는 언제부턴가, 좀 더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나와 비슷한 집 풍경에 살고 있었는데, 서로의 집에 밥먹듯이 드나들었다. 함께 책도 읽고, 노래도 부르고, 간식을 먹곤 했다. 유독 예쁘고 공주님 같은 다른 친구 하나는 내가 자신의 단짝을 빼앗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교실에서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반 친구 아이들이 슬금슬금 나를 피해 다녔다. 눈치가 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였다. 처음 며칠은 그러려니 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친구들이 우르르 공주님 같은 친구 곁에 모였다. 무언가 굉장한 일이라도 있나 싶어 다가가면, 나를 피해 자리를 옮겼다. 책상에 돌아가면 책이 찢어져 있거나, 연필이 없어지곤 했다. 넓은 교실이 확장이라도 된 것처럼 더욱 넓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아마 감정선을 따라가 그림을 그린다면 그날 내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으리라.


살며 처음 겪는 일이었다. 친구들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공주님 같은 그 친구가 하는 방식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엄마 지갑에서 몰래 천 원짜리를 꺼냈다. 학교에 가서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시답잖은 불량식품을 사줬다. 문방구에 파는 조그마한 알이 박힌 반지나, 연필 등도 서슴지 않고 사서 주었다. 나는 그렇게 돈으로 아이들을 매수했다. 방법을 몰랐다. 괴롭힘은 덜했지만, 햇살 같은 얼굴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그런 날들마저 오래가진 못했다. 죄수가 옥에 끌려가듯 집에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누군가 이름을 부르면 화들짝 놀라곤 했다. 악몽을 꾸었고, 매일을 죄책감에 시달렸다. 배가 고프다가도 집에 가면 밥맛이 없었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발길에 낙엽이 질척였고 여느 날처럼 집에 오자마자 냉큼 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민혜야. 엄마가 좀 들어갈게."


부엌에 있던 엄마가 내 방으로 들어오신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분명 도둑질을 들켰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들어오시자마자 지갑에 돈이 자꾸 빈다고 이야기하셨다.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야. 일어나서 바지 올리려무나."


더 이상 묻지 않으셨다. 그날 회초리에 맞은 종아리가 얼마나 아팠는가는 기억에 없다. 맞은 일이 억울해서가 아니라, 어떤 해소감 따위에 나는 엉엉 울었다. 무거운 죄책감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처음 알았다. 그날 저녁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반성문을 길게 써 내려갔다. 나는 진심으로 반성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노트 한 장 가득 채워 엄마 문지방 앞에 가져다 두었다.

그날 나는, 아주 오랜만에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었다.


공주님 같은 친구와는 불편한 휴전을 하게 되었고, 그럭저럭 적응할 즈음 나는 또 한 번 전학을 갔다. 그 뒤로 10번 남짓 전학 가는 일이 계속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난생처음 전학을 간 곳에서 톡톡히 신고식을 치른 이후 사람에 대한, 친구에 대한 나름의 잣대가 생겼다. 이후 전학을 다니며 으레 와서 말을 걸고 친한 척하는 이들에게 반감 또한 생겼던 것 같다. 모든 관념은 상처에 비롯한다. 계속되는 새로운 친구들과의 인연 그리고 헤어짐 덕에 나에겐 사람을 만나고, 떠나보내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이 또한 상처였다.



누구나 살며 상처를 받아 그를 아로새기며 자신만의 무늬를 만들어간다. 그 무늬를 정체성이라 이름 붙인다면 우리 삶에 이를 깨트리고, 확장해 나아가는 일이 필연적이다. 당시 내가 옳다고 여겼던 관념들을 증명해가며 살기보단, 그렇지 않은 사람과 경우를 찾고 감정의 골짜기에서 헤어 나오는 일이 필요하다. 편견과 아집은 상처와 관련해 있어 스스로만이 보듬고 깨우칠 수 있다.


사람을 좋아했던 그때의 어린 전학생에게, 그 아픔은 누구의 잘못도 아님을, 그 고단함에 그저 포근한 품을 내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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