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는 시골 마을에, 동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앞에서 재롱을 피우며 자랐습니다. 도저히 깨부숴먹을 수가 없는 알사탕 하나면, 만사형통이던 시절이었죠. 시골에 났으니 당연할 수 있겠지만 저의 최애는 김치와 된장찌개였습니다. 할머니가 끓여주신 구수한 된장 찌개면, 밥 두 공기가 게 눈 감추듯 사라졌으니까요. 고집스럽고 사랑스러운 언니와 말썽쟁이 남동생은 저와 입맛이 달랐습니다. 밥보다는 군것질을 좋아했어요. 이젠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가 되고 보니, 어린 시절 저의 입맛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끄럽고 다정한 동네 할머니들 사이에서 저의 별명은 '토종닭'이었습니다.
자라면서 군것질이 늘어나도 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단 맛'에 대한 애정이었습니다. 팥빙수의 팥과 젤리를 싫어했고, 빵에 들어간 건포도가 싫었고, 곶감이 싫었습니다. 불고기에 손이 가지 않았고, 잡채나 진미채에 눈도 가지 않았어요. 공통점을 알았습니다. 과일을 참 좋아하는 제가 즐겨먹는 과일은 '사과'인데, 제법 손이 가지 않는 과일도 있었습니다. 바나나, 배, 단감 등이죠. 그저 달기만 한 과일들이요. 물론 이제 곧 마흔을 내다보니 때로 단팥도 먹고, 아이 젤리도 한두 개는 뺏어먹습니다만, 단맛을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합니다.
독특한 입맛을 가진 제가 단연코 사랑하는 음료는 따뜻한 아메리카노입니다. 어쩐지 어릴 적부터 '토종닭'이니 하는 별명도 그렇지만, 아이 탈을 쓴 어르신이랄까요. 저도 이런 제가 마냥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리 단 맛을 기피하니 몸이 날씬하고 건강하지 싶어 이제야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부러 다이어트도 하는데 말이죠.
씁쓰름한 아메리카노와의 첫 만남은 스무 살 필리핀 세부에서였습니다. 홀로 처음 간 여행지예요. 혼자라는 게 뻘쭘했기 때문에 리조트에서 조식을 먹을 때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야만 했습니다. 에그 스크램블, 야채볶음, 토스트, 샐러드 등을 자리에 가져다 놓고 편안한 척 불편한 식사를 시작했어요. 서빙하는 웨이터가 미소를 지으며 제게 다가옵니다. 저 역시 억지 미소로 그를 바라봐야만 했어요.
"would you like some coffee?"
"ah.. yes, no sugar please."
커피라는 걸 먹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제 취향을 말씀드렸다시피 자동 반사적으로 'no sugar'라는 말이 튀어나왔을 뿐입니다.
웨이터가 가져다준 머그잔에는 한약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메리카노 말입니다. 비주얼도 그랬지만 향도 낯설어 거부감이 일었습니다. 이즘 되면 주워왔나 싶게, 부모님은 단 맛을 매우 좋아하십니다. 아직까지도 아메리카노를 드시는 걸 본 적이 없을 정도니까요. 제가 아는 커피는 오로지 맥심 커피였어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머그잔을 입에 가져다 댔습니다. 아마 친구나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이었다면 그 새까만 물을 마시지 않았을 겁니다. 낯선 곳에서 홀로 마주쳤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세상 뜨겁고 습한 세부(Cebu)의 한 리조트에서, 한 모금 들이켰던 아메리카노의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첫 키스, 첫사랑처럼 몸에 각인된 기억이죠. 처음의 낯설고 색다른 그 느낌은, 백번을 반복해도 다시는 느낄 수 없기 때문인가 봅니다. 단박에 홀딱 반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후 저는 아메리카노를 즐겨 먹게 되었습니다. 씁쓰름하고 뒷맛이 깔끔한 아메리카노에 카페인만 없다면 종일 마실 수 있을 정도니까요.
'얼. 죽. 아'라는 말이 한창 유행할 때 알았습니다. 저는 어지간히 덥지 않고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지 않는다는 걸요. 이유는 얼음이 들어간 아메리카노는 그 향과 씁쓰름함이 옅어지기 때문입니다.
연년생을 낳고 2년을 넘게 모유 수유하며 그 좋아하는 아메리카노를 입에도 대지 못했습니다. 임신 기간까지 자그마치 4년 가깝게 말이죠. 이후 다시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후, 카페인에 예민함이 생겼다는 걸 알았어요. 오후 3시가 넘어서 커피를 마시면 밤새 눈이 말똥 말똥 합니다. 몸은 묵직한데 잠에 들지 못해요.
보통의 아침엔 5시에 일어나 명상을 하고, 스트레칭을 합니다. 이후 독서나 강의를 만나고, 아이들 등교 준비 전에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준비합니다. 현실로 들어가는 리츄얼이랄까요. 그렇게 씁쓰름한 향기로 행복감에 젖고 있자면 으레 아이들이 일어납니다. 이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출근 준비와 등교 준비로 전쟁을 치릅니다. 오후 3시가 넘어가면 늘 고민합니다. '아 오늘은 2잔밖에 못 먹었네.. 지금 얼른 한 잔 마셔도 되지 않을까?' 조절에 실패해 이따금씩 늦은 밤까지 말똥말똥하는 일이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