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보 후퇴

열 보를 물러설 수도 있는 거지만..

by 하민혜

외출하려고 옷장을 열었다. 기다란 원피스 하나를 꺼낸다. 얇은 스타킹을 먼저 끌어올렸다. 지퍼를 올리려다 아이에게 부탁했다. 침대에 올라서 꼬꼬마 손으로 용을 쓴다.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팔을 꺾어 뒤로 손을 옮겼다. 안감에 휘말렸나, 애를 써도 올라가질 않는다. 이만치 내려도 안 돼서 아예 쭉 내려버렸다. 그제야 위에까지 단번에 올라섰다.


살다 보면 진퇴양난인 것만 같은 순간이 있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 앞에 내가 모자라는구나, 좌절하는 수도 많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기르려던 날도 있고 힘을 주다 안되니 포기하는 날도 있었다. 만일 억지로 지퍼를 올린다면 어떻게 될까. 운 좋게 올라가는 수도 있고 옷이 뜯어져 버릴 수도 있을 터다. 끝내 올리는 게 생의 목적이면 지퍼가 울퉁불퉁 해진들 별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단지 힘을 기르려는 시간과 얼굴이 벌게지도록 애쓰는 모습에 연민이 든다. 잠시 후퇴하면 될 것을, 그걸 참 두려워하는구나 싶다. 나를 내리는 게, 낮추는 게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당장 내려간 처지에 비관하는 우리다. 지금 이 순간을 살라는 것은 여기 머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회의감에 휩싸이거나 걱정이 많다면 도리어 내려간 일에 머물러서다. 미래도 여전할 것이라는 낙담은 나를 지금에 있지 못하게 한다. 실패나 후퇴, 멈춤에서 무언갈 배우려면 지금 있는 이곳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현재를 산다는 건 붙잡고 미련을 떠는 게 아니라, 매 순간이 미래로 넘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현재를 살라는 말은 현재 기쁨을 누리라는 것과 같다. 내려간 순간에만 볼 수 있는 게 있다. 이혼서류를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슬픔과 낙담과 자기 비하가 오고 가는 순간조차 내겐 맛보고 누릴 자격이 있다. 내가 겪는 모든 일은 지금뿐이라는 점에 하나같이 소중하다. 삶의 목적을 경험에 둔다면, 삶은 결론이 아니라 과정임을 이해한다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을 살아간다는 건 어떤 마음 앞에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태도다. 원망이 없고 초조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괜히 지난날을 떠올리며 미련 떠는 일이 왜 없을까. 그런 나를 도닥이고 손 잡는 건, 모자란 나를 받아들여야 할 내가 할 일이다.


내가 나를 괜찮아할 때 모든 게 괜찮아진다. 감정이 요동치는 와중에도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깃든다. 모든 게 존재 자체로 특별하다는 것은, 나라고 특별하지 않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지금 느끼는 생각 감정이라봐야 유별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왜 나는 병에 걸리면 안되는가, 나라고 실패를 겪고 이혼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가슴 깊이 이해하고 나면 부족한 내가 편안해진다. 부적절하고 불편한 나라도 괜찮다.


모자란 것이 괜찮으면 이대로 모자라면 어쩌나, 염려하는 마음일지 모른다. 실은 결핍을 감추려 애쓸수록 그런 존재임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게 된다. 나는 그런 내가 점점 불편해진다. 스스로를 부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마음을 바로 보지 않으면, 자꾸 다른 사람을 걸고넘어지게 된다. 주변에 하나씩 불편한 사람이 늘어간다. 마음에 들다가도 영 삼키지 못하겠는 말과 행동을 타인에게서 보게 되는 식이다. 모든 게 내 마음 하나인 줄 알기까진 시간이 걸린다.



운이 좋다면 지퍼가 찢기지 않고 목적지까지 올릴 수 있다. 삶이 맨 위로 올라가면 끝판왕 깬 것처럼 모두가 폭죽을 터뜨리면 좋겠다만. 정작 꼭대기에 올라도 오르지 않더라도 죽음 앞은 평등하다. 게 중에 절반은 애를 쓰면 쓸수록 옷감은 망가질 테고 오지게 힘만 들어갈지 모른다. 평생 고생으로 삶을 마감하는 경우다.



살다 보면 뒤로 물러서는 날이 있다. 인생이 나아가지 못하는 기분이다. 기분이 아니라 실제 상태가 그럴 것이다. 어쩌면 후퇴하는 이유가 좀 더 쉽게 위로 올라가기 위함인지 모른다. 알 수 없다. 할 수 있는 건 오만과 편견을 경계하는 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자유하는 일이다. 지금을 맛보려는 의식을 낼수록 삶을 누리는 권리를 행할 수 있다. 나는 살아야 할 의무가 없다. 오직 삶을 누릴 권리를 가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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