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면

딸과의 대화

by 하민혜

어젯밤 아이들과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에서

두런두런 대화가 오갔습니다.


서연 : 엄마, 승우(가명입니다)가 내 말에 대충 대답하고, 나한테 계속 신경질내고 밀어놓고선 아니라고 해. 심지어 밀지 않았다고 화내더니 짜증 나는 말투로 미안하다고 하잖아.


나 : 아이고.. 우리 서연이 많이 속상했겠네


서연 : 속상한 게 아니라 진짜 짜증 나!


나 : 그래 얼마나 짜증 났어~ 오구.. 많이 짜증 났겠구나~ 속상하겠어~


서연 : 훌쩍훌쩍


나 : (토닥토닥) 우리 딸이 얼마나 화가 났을까, 슬펐을까~ 무시당하는 게 얼마나 아팠을까~~


윤우 : 와 진짜 너무했다~ 우리 누나한테 왜 그러지? 내가 거기 있었으면 승우를 걷어차 버렸을 건데!!


딸은 이제 10살입니다. 울보가 아니긴 한데,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미운 4살 때 마냥 우는 아기 얼굴이에요. 3분 정도 지났을까요. 품에 안겨 있다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었습니다. 처음과는 다르게 평온한 모습입니다.

오늘 동생 윤우와 저는 집에 있었고, 딸은 혼자 승우 집에서 놀다 들어온 참이에요. 슬며시 딸에게 물었어요.


나 : 우리 딸, 이제 괜찮아졌어?


서연: 웅..


나: 서연아. 다른 사람들은, 그리고 세상은 어떻다고 했어?


서연 :.. 하나라고 했어


나 : 그래 맞아. 서연이는 오늘 승우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하지만, 그 무시당하는 느낌은 예전에 엄마에게서, 윤우에게서, 다른 친구에게서 느꼈던 느낌이야. 앞으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은 이따금 느낄 수밖에 없는 마음이지. 너무 미워하고 싫어하지 말고, 그저 느낌이 지나갈 수 있게 해 줘.


서연 :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 마음은 잘 느끼고 이제 승우는 절교할 거야.


나 : ㅎㅎㅎ 오늘 승우네 집에 가지 않고 여기 있었더라도 서연이는 어쩌면 그 마음을 느꼈을 거야.


서연 : 맞아. 윤우한테 어쩌면 아빠한테, 엄마한테 느꼈을 수도 있어.


나 : 그래 맞아. 승우랑 절교해도 앞으로 백 번, 아니 천 번째 승우를 또 만나게 될 거야. 다른 방식이고 다른 사람이겠지만 결국 그 마음을 느끼게 돼.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느낌 말이야. 봐. 우리 딸 봐봐. 배가 움직이지? 우리 명상할 때처럼 오르고 내리잖아. 네 마음도 그저 그럴 뿐이야. 파도치는 것처럼.


언제나 싫은 감정이 올라오면 상대를 원망하고, 탓하기 마련이죠. 실제 명백하게 그 사람의 잘못인 일도 있습니다. 나는 꿈을 꾸는 게 아니고, 객관적으로 이 상황을 보았을 때 상대가 100%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때에는 상대가 정말 이기적이고, 인간 같지도 않아요. 나라면 절대 저렇게 안 하지 싶은 거예요.


이렇게 당할 뿐이라니, 하필이면 내가 그 사람에게 당했다는 마음. 이렇게 피해의식이 생기면 정말 억울하다 못해 살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느끼기도 해요. 범죄 수준의 일을 겪었을 때에만 이런 억울함과 원망을 느낄까요?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도 얼마든지요. 세상이 내 마음 같지 않다고 느낄 때, 내게 이런 느낌을 안겨주는 세상(타인)에게 일종의 배신감(?), 억울함이 드는 거예요.


'싱킹 101'은 최근 떠오르는 인지 심리학을 다룬 책입니다. 책을 읽으며 심리학적인 측면으로 보아도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어리석은지를 알 수 있었어요. 유창성 착각부터 확증 편향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인지 능력은 말 그대로 판단 오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판단 오류를 갖게 된 이유가 생존과도 직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제가 느낀 그대로를 말씀드리면, 인간은 편견 덩어리이며 오직 자기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해 그러니까, 나의 관점으로 보는 세상(상대방)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반박할 수 있는 일과 증거들을 들이대도 편향 해석 시스템이 작동하면서 해석에 오류가 생긴다고 해요. 내가 믿는 대로 끼워 맞춰 판단을 내린다는 겁니다.


이런 오류들이 학문 수준이나 한 사람의 지성과 상관이 있는지도 궁금해졌는데요. 이는 심리 영역이기 때문에 지적 능력으로는 조금의 차이도 만들지 못합니다. 도리어 누가 보아도 '똑똑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가 가진 생각에 대한 믿음이 더 견고한 수가 있다고 해요. 해서 기울어진 편향이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지식을 쌓는 것과 지혜를 쌓는 일은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 올해 10살이 된 딸이 때로는 마흔이 넘는 어른보다 지혜롭게 상황을 풀어 나가기도 하니까요. 제 삶에서 승우를 지우겠다는 딸에게, 진짜 버리려는 게 승우가 아니라 승우를 통해 느낀 마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상황이 싫고, 그 사람이 싫다고 말하지만 언제나 내가 버리는 건 느낌이고, 마음입니다. 그저 승우가 문제라면 승우를 버리면 그만인 게 맞겠죠. 어리석은 생각은 늘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아 헤매고, 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다시는 그 느낌을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요. 다만 그 느낌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면 어떤가요? 무시당하는 느낌,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은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사실 아픈 느낌이에요.


아픈 느낌을 느끼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싶은지가 느껴져요. 특정 누구에게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거예요. 그 마음은 잘못이 아닌데 잘못인 것처럼 죄인 취급을 당하게 되죠.


인지 심리학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사람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진실은 언제나 '내가 틀릴 수도 있다'에서 시작해요. 지혜롭게 살아간다는 건, 내가 무언가를 아는 게 아니라 알지 못한다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겁니다. 어떤 상황에 대한 해석이, 사람에 대한 판단이 들 때마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난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중요한 것은 상황이 아니라, 아픈 나의 마음인 거예요. 상대와 인연을 끊든 않든 그건 관계 없어요. 판단이나 해석을 내려놓고 나의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어떤 마음에도 잘못은 없으니까요. 그 마음을 미워할 때 괴로운 것 뿐입니다.


나 : 엄마 말이 어려웠지?


딸은 고개를 도리 도리 돌리고 제 품에 더 꼭 안깁니다.


서연 : 엄마. 오늘 엄마가 더 예쁘다고 내가 얘기했어?


나 : 고마워 서연아~


서연 : 엄마가 예쁘지 않았던 날은 없지만, 오늘은 더 예뻐~


나 : 우리 딸이야말로 예쁘고 사랑스러워~

우리 이제 그만 명상하고 잘까?


서연 : 웅 엄마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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