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와 프랑스어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수능 과목에서 제2외국어에 해당하는 외국어는 8개,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아랍어, 베트남어가 있습니다. 거기에 한문까지.
2022학년도 기준으로 일본어 응시자가 8,395명으로 가장 많고, 그다음으로 아랍어, 중국어, 한문 순으로 응시자가 많았습니다. 제2외국어는 원점수를 기준으로 구분하여 등급을 부여하는 절대평가 방식입니다. 물론 전공어 관련 학과 모집에서는 해당 언어를 응시한 학생들에게 가산점을 부여하거나 감점을 적용하는 등 대학별로 반영 내용이 상이합니다만, 그 외의 학생들은 9등급 절대평가제를 적용받습니다.
시험장에서 소위 '찍기'로 받은 점수대인 8~9등급의 인원이 한문까지 포함해서 전체 응시자의 40%가 넘고, 7등급 인원도 18%에 이르죠. 다시 말하면 그렇게까지 대입에 변별력이 있는 것이 아니니 특정한 대학(반영에 가산 혹은 감점을 하는)의 관련학과를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제2외국어 공부할 시간에 국어, 수학, 영어, 탐구를 공부하라는 권유를 학생들은 실제로 받는다고 합니다.
제가 제2외국어 얘기를 꺼낸 이유는 1990년대까지 인기학과로 꼽혔던 독일어교육과, 불어교육과 등 외국어 교육학과들이 사라질 위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수능 과목에서 일본어 응시자가 전체의 25%인데 반해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선택한 학생은 각각 3.6%, 5.2%밖에 되지 않는 것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원의 수요가 급감하니 대학을 중심으로 비인기 외국어 교육학과들이 통폐합되고 있는 것이죠. 대입정보포털 '어디가' 사이트에서 학과 키워드로 '독어교육과'를 넣으면 다음의 4개 학교가 조회됩니다.
대입정보포털 '어디가' 검색 결과
부산대의 경우 사범대의 독어교육과를 인문대의 독어독문학과에 통합한다고 밝혔고, 2024학년도부터 신입생을 뽑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외대의 경우도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 교육과를 '외국어교육학부'로 통합해서 올해 첫 신입생을 뽑았습니다.
1990년대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기만 해도 독일어와 프랑스어는 인기 외국어 과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죠. 그러다 보니 국공립 임용시험을 통한 독일어, 프랑스어 정교사 선발은 2008년, 2009년이 마지막이었다는군요. 서울대의 경우도 독어교육과, 불어교육과에서 지난 10년간 교사를 배출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 복수전공을 해서 일반 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관례처럼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독일어와 프랑스어 중 하나를 제2외국어로 선택하게 된 배경에는 독일과 프랑스가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사회복지의 모델링이 될 만큼 강대국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급변했고, 경제와 산업의 판도가 바뀌었습니다. 그에 따라 필요한 인재의 역량도 달라졌기 때문에 대학을 중심으로 빠르게 전공을 개편하게 된 것일 테지요.
고등학교는 여전히 입시라는 명목 하에 20~3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과목들 위주로 배움이 지속되고 있지만, 대학은 훨씬 전부터 경제와 산업의 수요에 맞춰 민첩하게 학과가 만들어지고, 통폐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다양한 진로를 고려한 커리큘럼은 찾아보기 어렵고, 이름만 멋지게 바뀐 경우가 허다합니다. 여기에 '학교 효과'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취업률이 '학교 효과'를 대신할 따름이죠. 그저 학생들을 선발하고, 그 학생들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학교를 마치는 것에만 혈안이 된 대학들은 학생들의 응시 수수료와 등록금으로 좋은 건물을 짓고, 땅을 넓히는데만 힘을 쏟고 있는 형세입니다. (물론 대학 관계자님들이 이 글을 보고는 아니라고 하실 테지만.... 학부모 입장은 그렇습니다.)
대학들은 자기 밥그릇 챙기기 행정에서 벗어나서 학생들이 학문적으로 발전하고,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을 기를 수 있는 연구와 커리큘럼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한기에 800만 원이 넘는 학비를 지불하는 것이 결코 아깝지 않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