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저는 우리 반 아이들이 졸업식날 모두 다 참석해서 함께 얼굴 보고, 졸업을 축하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바람입니다.
며칠 전 고1 큰아이의 학부모 상담을 갔을 때 담임 선생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무슨 소박한 바람이란 말인가' 싶었지만돌아서서 생각해보니 저 역시도 저의 졸업식이 좀처럼 기억나지 않더라고요. 기억 속에서 깡그리 사라져버린 고등학교 졸업식. 심지어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걸 보면 부모님도 오시지 못하게 한 게 분명합니다. 대학을 떨어지고,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하고 보잘것없이 느껴져서... 그래서 도망치듯 졸업식장을 빠져나온 것 같습니다. 학교를 결석하면 큰일 나는 줄 알던 엄마 때문에 졸업식을 가지 않을 배짱 따위는 부리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충실하지 못했던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부끄러움과 후회 덕분에 지금까지 저는 계속 배우고 공부하는 삶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실패를 겪습니다.물론 그 실패의 크기와 정도는 저마다 다를 수 있죠.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실패를 겪기 전까지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역경에 취약한 사람인지, 좌절을 겪었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말이죠. 보통 좌절을 겪었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공격적인 양상을 보입니다. 그 공격성이 내부로 향하면 자기 학대나 우울증으로, 외부로 향하면 타인에 대해 적대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죠.
어제는수능 출제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하는 마지막 모의고사가 치러진 날입니다. 수시 원서 접수를 앞두고 실시된 모의고사인 까닭에 고3 수험생들은 수능을 치르는 긴장감으로 시험을 봤을 것입니다. 모의고사 성적에 울고 웃는 고3의 현실은 매우 비현실적이지만, 부모라면 그런 자녀의 상황에 무조건 공감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입시를 앞둔 아이들에게 대학의 간판과 합격은 절대적인 '성공 방정식'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 눈앞에 놓인 시험 점수가 내 미래를 결정한다고 믿어버릴 수 있죠. 어떤 아이는 우울해하고, 또 어떤 아이는 세상을 부정하고 비난합니다. 이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저의 모습이기도 했죠. '설마 내가 대학에 떨어지겠어?'라고 생각했던 헛된 망상과 어설픈 기대가 견딜 수 없이 한심하고, 바보같이 느껴졌습니다. 입시의 낙방은 곧장 부모님의 성적표가 되었고, 부모님의 깊은 한숨과 축 처진 어깨는 저를 더욱 괴롭혔습니다.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이 다시 상승 곡선을 그리는 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제가 쏟아부은노력들이 한때는 토익 점수로, 어떤 때는 자격증 취득으로, IMF로 힘들다던 시기에는 취업으로, 이후 대학원 진학과 학위 취득으로 이어지면서 이루어낸크고 작은 성취와 만족감들로서서히 회복되었으니까요. 그러니 자녀 앞에서 부모는 절대로 초조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그냥 의연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생활을 지켜 나가세요. 그것이 수험생 자녀에게는 말보다 훨씬 큰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잘한 것을 자신 있게 드러내는 것은 자신감이 아닙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죠. 하지만 잘 못하더라도, 실패했더라도 그것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노력해 나가는 자세는 아무나 가질 수 없으니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신감이 아닐까요? 우리 아이가 자신에게 닥친 위기와 좌절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하느냐는 부모님의 말과 행동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부터 나는 아이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고,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고민해 보세요.
딸애 담임 선생님의 소박한 바람은어쩌면고3 모든 담임 선생님들과학생, 그리고 학부모의 간절한 소망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