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거절은 나에게 그냥 참 힘든 일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늘 그래왔다.
20대 때에는 오지랖이 넓은 건 줄로만 알았다.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문득 깨달았다. 그 누군가로부터 내게 건네지는 지시, 부탁, 그리고 가벼운 약속마저도 그 모든 것이 나에겐 거부할 수 없는 순응이라는 책임감이 뒤따르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오지랖이 넓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것저것 부탁하는 일, 하물며 누가 밥을 사 달라고 해도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내가 그저 성격이 두리뭉실해서 이타심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했다.
가정을 꾸리고, 사회에 재단되고 마모되고 오지랖은커녕 나의 일상을 건사하는 것조차 힘든 일이 되었을 즈음에도 거절은 늘 힘든 일이었다. 그냥 툭하고 “오늘은 안돼.” “그 일은 할 수 없어.”라고 건조하고 쿨하게 되돌려주는 것은 전화벨이 한참을 울리고도, 침을 한 번 삼키고도 내뱉기 힘든 말이었던 것이다. 거절의 상황이 닥치면, 연락두절이라는 회피 아니, 도망을 선택하기도 했다.
만나기 싫은 사람이 만나자고 할 때, 약속은 해 놓고 당일 날이 되면 온갖 핑곗거리를 찾기 시작한다. 결국 적당한 핑계 하나를 만들어 거절을 하고 나면 반나절은 계속 마음이 불편한 채 흩어진 시간을 보낸다. 하기 싫은 일을 한다고 자신했을 때, 막상 날짜가 다가오면 온갖 이유를 대며 미루기 시작한다. 결국 애초 당차게 선언한 날짜를 맞추지 못하고 애먼 신뢰만 30프로쯤 깎이는 인상을 받는다. 결과물도 당연히 좋을 리 없다. 그럼에도 거절을 못하는 상황을 면전에 두면, 또 다른 자아가 나타난 듯 탈을 쓰고 그렇게 하하 호호 연신 좋은 표정을 짓는다. 맞장구는 또 얼마나 잘 쳐주는지 모른다.
'그 자리에서 싫다고, 아니라고 말해.'라고 쉽게 거절하는 게 차라리 상대편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깨달았을 때는 가장 가까운 주위 사람들이 싫어도 거절하지 못하는 나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 때다. 그게 의당 나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얼굴에 싫은 표정이라도 한 끗 내보여야 상대방이 알아차릴 수 있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은 거절하지 못해 도망을 선택하는 날도 있다. 하지만, 나의 의향이 얼굴이든, 제스처든, 목소리로 물들 수 있게 노력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이제 수많은 관계, 타인의 시선, 판단 따위는 나의 책임감과 무관하다고 어느 정도 선을 그은 후부터다. 이제 좀 어른이 된 걸까. 좀 더 잘 거절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날이면 나에게서 조금 더 해방되는 날일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