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한 8월
글 시작에 앞서, 알랭 바디우라는 이름이 뭔가 익숙해서 생각해 봤더니 이전 독서모임에서 했던 책 중에 알랭 로브그리예 님의 질투라는 책을 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알랭이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인가? 싶어서 나무위키를 보았더니 실존인물에는 알랭 파비앵 모리스 마르셀 들롱, 알랭 레네, 알랭 바디우, 알랭 프로스트, 알랭 드 보통, 알랭 생막시맹, 알랭 마르케스, 알랭 머시 뭐 이렇게 나왔다. 비록 알랭 로브그리예님은 포함이 되어 있지 않지만, 빠진 사람까지 하면 알랭 이라는 이름 흔한가 보다라는 생각과 함께 글 시작.
『사랑 예찬』은 전체 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글은 질문과 철학자(알랭 바디우)의 대답 형태로 사랑에 관한 공개 대담을 편집하여 이루어져 있다. 개인적으로 사랑과 관련된 철학적 논의에 관심이 많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내가 기본적으로 관심이 있는 사랑은 '박애'의 개념과 관련이 깊은데, 알랭 바디우의 사랑은 로맨틱, 섹슈얼을 포함하는 연인 관계의 사랑의 개념이다. 사랑과 관련된 철학적 개념들은 낭만적 개념, 계약적 개념, 회의적인 개념(31-32)으로 나타낼 수 있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이러한 개념들로 환원되지 않는 것(32)으로 보며 진리의 구축(32)으로 보았다.
사랑, 박애의 개념이 아닌 이 책에서와 같이 연인 간의 사랑의 개념은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진리의 구축으로 이어진다는 개념이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알랭 바디우는 이에 대해 하나가 아닌 둘에서 시작되어 세계를 경험하는 것(32)과 동일성과 차이를 기반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32)으로 설명한다. 철학의 시작이 개인과 세계에 대한 이해, 탐구라는 점과 자아와 피아의 동일성과 차이에 관한 물음이 철학에서 많이 던져지는 질문인 만큼, 사랑의 관계 역시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쉽게 다가온다. 이는 알랭 바디우가 사랑 그 자체를 윤리적인 것이나 헌신적인 경험으로 보는 것이 아닌(33), 실존적인 제안(34)으로 본다는 점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알랭 바디우의 사랑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동일성과 차이를 기반으로 한 세계의 이해(32)이기 때문에 사랑의 구축 역시 두 사람 간의 차이와 분리, 구분(39)으로부터 시작한다. 또한 진리의 구축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단순한 만남이나 폐쇄적 관계가 아닌 무언가를 구축하는 것, 단순한 시작만이 아닌 지속성과 그 과정에 대한 물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41). 알랭 바디우의 사랑의 지속성은 항상성과 영원성만의 의미를 담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지속되는 여러 가지 방식을 사랑이 창출한다는 의미(44)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삶의 재발명(44)이 될 수 있으며 삶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도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진리의 구축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사랑의 구축(3장)'과 '사랑과 진리(4장)'라는 두 개의 장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였다. 사랑이 세계의 구축, 관계의 구축이 아닌 진리의 구축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랑과 진리 사이의 관계성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사랑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52)다는 점에서 진리와 동일성을 보이고, 우리가 사랑을 사랑한다는 속성은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는(52) 속성과 동일성을 보인다. 사랑이 보편성을 띠기 위해서는 앞서 사랑의 구축에서 언급한 지속성이 필요하다. 우연으로 시작되는 사랑은 충실성(56)과 선언(55)을 통해 지속성을 구축하게 되고, 이러한 지속성은 끊임없이 재연되는 사랑의 과정은 진리의 모든 과정과 유사(62)하다.
『사랑 예찬』에서 아이에 관한 관점을 사랑의 종착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불임 커플과 동성애 커플 등을 고려하여 하나의 지점이라는 사랑의 공간에 속하는(60-61) 것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그의 논의가 보다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생을 진리에 대한 탐구라고 바라보았을 때, 진리에 대해서 아직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존재를 배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하여, 단순히 사랑을 종의 재생산측면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지점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경험(67)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사랑의 목적을 종의 재생산 측면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가임기 여성 지도'와 같은 기이한 사회 현상이 나타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의 정치를 공허한 표현(68)이라고 언급하였는데, 이는 사랑을 사적인 관계에서 분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적들에 관한 물음(69)임도 분명 사실이지만 정치를 통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사랑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적은 존재하는지 아닌지(69)에 대한 질문은 진리의 구축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사랑의 구축과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의 연적을 경쟁자로 바라보며 완전히 외부에 있으며 사랑을 규정하는 데에 개입하지 않는다(70)라고 언급하지만 사실 사랑의 경쟁자는 완전히 외부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분명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연인과 현재의 연인, 또는 연인에 대한 이상적 이미지와 실체를 비교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때 과거의 연인은 그 사람의 진정한 실재적 모습이라기 보다는 내면에서 재생산되어 만들어진 이미지에 가까울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미지는 완전히 외부에 있(70)거나 사랑을 규정하는 일에는 조금도 개입하지 않는(70)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으며 사랑을 규정하는 데에도 개입한다. 또한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이기주의(71)라고 하였는데, 이렇다면 사랑에도 역시 적이 있다는 점에서 정치와의 구별성을 지닌다고 하기 어렵다. 또한 진정한 정치는 모두 확실한 적을 구별(70)한다고 언급하였으나 과연 정치에서 '확실한 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현실 정치에서는 이해관계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 '적의 적은 나의 동지'라는 표현이 가장 잘 드러맞는다. 현실 정치 뿐만 아니라 정치가 '더 나은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사회적 과정'이라고 바라보았을 때 적에 대한 구별이 정치에 대한 본질이기보다는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서의 탐구를 정치에 대한 본질로 바라보는 것이 더욱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는 박애를 가장 모호한 단어(73)라고 설명한 지점과 연결되면서 그의 철학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남은 지점이다.
『사랑 예찬』은 사적인 관계를 공적인 관계의 이해로 바라본 것이 흥미로웠다. 사적인 관계와 공적 관계의 연결은 공동체와 개인의 정체성의 '우호적인 공존(73)'의 시발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