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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희 Jun 27. 2024

여름, 그 맛

콩국수의 계절이 돌아왔다.

때 이른 무더위에 식당들은 저마다 계절메뉴로 콩국수를  내놓는다. 푹 불린 콩을 곱게 갈아 만든 콩국에 국수를 말아 넣는 음식인 콩국수. 비교적 간단한 조리법 때문일까. 분식집부터 백반집에 국수 전문점까지, 콩국수를  파는 곳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여름이 되면 나는 콩국수 삼매경에 빠진다. 콩국수는 내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한 그릇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기도 하다.


며칠 전 친정인 부여에 내려가 부모님을 모시고 콩국수로 유명한 맛집을 찾아갔다. 친정 집 길 건너편에 있는 ‘고참밀가’라는 식당인데,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부터 콩국수로 유명했던 집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콩국수 맛집으로 명성을 떨친 지가 25년이 넘은 셈이다.


고참밀가 식당의 자리는 본래 도배와 장판 업을 하는 가게였다. 주인 내외가 반평생이 넘게 인테리어업을 해오다가, 어느 날 업종을 바꿔 같은 자리에 ‘고참식당’이라는 상호로 중국 음식집을 차린 것이다.

정통 중국집과 달리 ‘팔보채’ 같은 일품요리는 찾아볼 수 없었고, 자장면과 짬뽕, 칼국수 같은 면 요리가 주메뉴였다. 중국요릿집이라기보다 국수를 파는 서민음식점에 가까웠다.

그러다 계절 메뉴로 출시한 콩국수가 맛있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어느 날부터 문전성시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날이 더워지면 고참밀가는 온종일 콩국수를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


주인 내외는 여름 내내 정신없이 콩국수를 팔다가 어느 날부터는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다음 해 여름이 올 때까지 식당 문을 닫고 장기 휴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계속해서 여름 한 철 장사만 해왔다.


콩국수의 맛이 깊어질수록 주인 내외의 머리는 하얗게 세어갔고, 기력이 딸려 장사가 힘겨워 보일 때쯤 가족 중 누군가에게 가게를 물려주었다. 식당의 새 주인은 가게의 상호를 ‘고참식당’에서 ‘고참밀가’로 바꾸었다.


바뀐 가게의 상호가 입에 붙을 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야 손님들도 새 주인의 콩국수 맛에 익숙해졌다. 원주인이 전수해 준 콩국수의 비법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간 것이다.


여름이 되면 나는 고향에 갈 때마다 어김없이 고참밀를찾아간다.

오후 네 시 반, 저녁을 먹기에 이른 시간임에도 식당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콩국수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파리 한 두 마리가 테이블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내 신경을 건드렸다.

고향이니까…. 맛집이니까…. 이 정도는 정겨운 시골 풍경으로 봐주기로 한다.


식당 아주머니가 커다란 은색 쟁반 위에 콩국수를 올리고 우리를 향해 걸어온다. 그리고는 무심하게 툭! 하고 무광의 스텐 그릇 세 개를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그릇 안에는 영롱한 진주 빛깔의 콩국수가 담겨있다.

너무 하얗지도 누렇지도 않은 적당한 진주빛의 고급진 색감의 국물.

콩 국물을 먹기 전에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번 휘저어 국물의 농도를 확인해야 한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감이 있어야 걸쭉하고 구수한 국물이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침전물이 잘 섞이도록 저은 뒤 콩 국물을 먼저 먹는다. 수저로 떠먹다가 감질맛이 나면 양손으로 그릇을 들고 후루룩 마셔야 한다.


부드러운 질감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백태의 고소함은 현기증이 날 정도다. 첫 입은 짭짤한 맛이 났다가, 이내 고소함이 짠맛을 눌러 버린다.

콩 국물의 한가운데 솜뭉치처럼 동그랗게 말아져 있는 면은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솜뭉치 같기도, 실타래 같기도 한 면에는 냉면을 먹을 때처럼 면에 가위질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


찰지고 탱글탱글한 면을 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해체한다. 면 사이사이로 콩 국물이 서서히 배어든다.

콩 국물을 계속 떠먹다 보면 금세 배가 불러온다. 콩은 단백질 덩어리라고 하니 과식을 해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남은 면도 국물과 함께 모두 먹어 버린다.


내게는 최상급 한우보다도 여름에 먹는 콩국수 한 그릇이 보양식이다. 감탄하며 맛있게 먹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흐뭇해하신다. 이제는 너무 커버린 자식인데, 아직도 자식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게 그렇게 좋으실까.

엄마가 콩 국물을 포장해 주겠다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올여름이 무척 더울 것이라고 제아무리 겁을 주어도 상관없다. 내겐 더위를 날려버릴 콩국수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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