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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희 Feb 12. 2023

할머니집 뒷방

연중무휴 국제상회 과일가게 안의 집

'난 옥수수를 볼 때마다 민희 할먼네서 팔던 노란 옥수수가 생각나. 그때 되게 맛있어 보였는데...'


친구들과 옛날이야기를 할 때면 친구 혜지는 우리 할머니댁에서 팔던 노란 옥수수를 이야기하곤 한다.  

큰 솥단지 안에서 뜨거운 김을 내며 푹푹 삶아지던 노란 옥수수. 열기를 타고 흩어지는 달큰한 향이 온 동네를 자극했었다. 솥단지 뚜껑 위로 다 익은 옥수수가 가지런히 올려지면 우리들은 그 앞에서 침을 삼켰었다. 그때의 색과 향이 어린 우리들에게 얼마나 강렬했는지 옥수수를 보면 가끔 그 기억이 떠오른다.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국제상회'라는 상호의 과일가게를 운영했다.

가게 밖에 긴 매대를 계단식으로 놓고 그 위에 과일을 진열해 팔았다. 지금이야 마트에 가면 사시사철 원하는 과일을 언제든 사 먹을 수 있지만 옛날에는 딱 그 계절에만 먹을 수 있는 제철과일을 팔았었다.

여름에는 짙은 녹색의 커다란 수박이, 겨울에는 주황색의 크고 작은 귤들이 계절의 순서대로 매대에 올려졌다. 과일과게 손녀였던 나는 제철과일을 가장 빨리 맛볼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할머니 집으로 달려가 매대 위의 과일을 골라 먹곤 했다. 내가 예쁘고 싱싱한 과일을 찾아 먹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는 채반에 가득 담긴 사과를 손에 쥐고, 갈색으로 썩어버린 부분을 도려내고 먹었다.


매대 사이로 난 좁다란 길을 걸어가 미닫이 유리문을 열면 과일가게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가게 안의  중앙에는 제사에 필요한 산자와 과자들이, 벽면에는 과일 통조림이 가득 메워져 있었다. 쌓인 과자들과 통조림 사이를 지나면 할머니집 안방이 나왔다. 할머니집도 가게와 살림집이 붙어있었다. 우리 집이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댁에도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은 없었다. 일터와 거주의 공간이 분리되지 않은 삶. 일 하는 곳에서 세끼의 밥을 먹고, 자고 일어나는 출근과 퇴근의 구분이 없는 삶을, 할머니와 부모님은 그렇게 살아왔다.


할머니의 살림집에는 안방과 주방, 그리고 주방 끝에 딸려있는 방이 하나 더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을 '뒷방'이라 불렀다. 어느 집이나 첫 째는 다른 남매들에 비해 혜택을 누리는 법. 식구가 많아 각자의 방은 꿈도 못 꾸던 시절, 뒷방은 일찌감치 언니 차지가 되었다. 뒷방에는 새 침대와 책상, 피아노가 들어왔다. 그 방에서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한 건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이 자개로박혀있는 할머니의 그릇장이었다. 언니의 공간이었지만 이곳이 할머니의 집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자동차 부품들이 늘어져있는 우리 가게보다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과일들이 가득한 할머니집이 포근하고 좋았다. 친구들과 실컷 뛰놀다 날이 어둑해지면 할머니집에서 잠을 잤다. 밤이 되면 할머니는 방에 요강을 들여놓고 새벽에 할아버지와 번갈아 가며 사용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잠결에 듣는 소변소리만 들어도 볼일을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밖에 없었다. 유별나게 청결에 신경을 쓰던 할머니도 밤에 화장실에 가기는 영 귀찮았나 보다.


할머니의 방에 요강과 오래된 괘종시계가 있었다면 뒷방인 언니의 방에는 최신 유행곡이 담긴 카세트 테잎과서태지와 아이들의 포스터들, 당시 유행하던 옷들이 있었다. 내 위로 4살 많은 언니는 어릴 적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호기심에 안방과 뒷방을 오가며 할머니와 언니 세대를 넘나들었다.  


초등학교 육 학년의 가을 때쯤이었을까. 새로 산 언니의 로엠 니트를 몰래 꺼내 입은 날이었다. 잠시 동생을 안고 있으라는 할아버지의 부름에 돌 전이었던 우리 집막둥이를 무릎에 안고 있는데 마침 가게 앞을 지나가던친구와 마주쳤다.


"헉! 너 동생이야?"

"응...."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치면 될 것을 갓난아기인동생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친구가 얄미웠다. 다른친구가 더 보기 전에 후다닥 할아버지에게 동생을 넘겨주었다. 할아버지는 능숙한 솜씨로 동생을 등에 올린 후 포대기를 둘러업었다.

곰돌이 모양의 연보라색 포대기를 두른 백발의 할아버지와 포대기 사이로 좋다고 팔다리를 발버둥 치는 우리집 막둥이.

국제상회 할아버지는 뒤늦게 본 손자사랑이 유별나다고 동네 사람들이 말했었다. 누가 보아도 지극한 손자 사랑이었다.


보라색 포대기를 두른 할아버지는 커다란 검정색 자전거를 타고 과일을 배달하다가 저녁이 되면 동생을 우리집에 데려다 주었다. 그리곤 밤늦게까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아가며 가게를 지키고, 나와 할머니를 지키다 밤 11시가 되서야 국제상회의 문을 닫았다.


매일같이 아침 여섯 시가 되면 과일을 떼 오기 위해 청과점에 다녀오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손님이 있든없든, 과일을 다 팔든 못 팔든 할아버지는 늘 한결같이 가게를 열었고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불평불만 없이 소같이 열심히 일하고 손자손녀에게 사랑을 베풀던 할아버지는 결국 60을 조금 넘긴 나이에 돌아가셨다.  

고등학교 삼학년 때 학교 수업을 듣고 있을 때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불러 지금 엄마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그 때 수화기 너머로 할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한참 멍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너무 어린 나이라 할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기에는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 던 날, 연중무휴였던 국제상회는 그때 처음으로 가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뒤로 문을 열지 못했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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