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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희 Mar 19. 2023

기숙사 통금의 추억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나다.

스무 살이 된 나는 드디어 부모님 집을 떠나게 되었다.

대학에 가거나 취업을 하면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시골아이들의 숙명이다. 시골에는 대학도 없고 직장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시골 아이들)는 성인이 되면 부모님 곁을 떠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캥거루 족이 될래야 될 수 없는 환경이다. 부모님 슬하에 있는 동안 각자의 단련?을 거쳐 더 높이, 최대한 집에서 멀리 있는 지역으로 뛰어오를 채비를 각자 해야 한다. 독립의 목적지가 서울이면 좋겠지만 그건 희망사항일 뿐 시골학생들에겐 어려운 일이다.   

어디가 됐든 다들 학년이 올라가면 갈수록 서서히 집을 떠날 준비를 한다.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대한 무한한 상상과 기대를 품고서...

공부 단련이 부족했던 나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전으로 대학을 가게 되었다.  


입학을 앞두고 집을 떠나는 날, 부모님은 덤덤했다.

엄마는 첫째인 언니가 서울로 상경할 때는 딸의 안위를 걱정하며 눈물바람을 하더니, 나를 보낼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호기롭게 독립을 외치며 집을 떠나는 사람치고 꾸려놓은 내 짐이 너무 단출했기 때문이다.  캐리어와 가방 그리고 이불 보따리 하나.  

조만간 다시 집에 올 것이 예상되는 소박한 내 짐을 차에 실었다.  


'조심히 잘 지내, 주말마다 내려와 엄마 일 좀 도와주고~ 응?‘

도와달라는 그 '일'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도 빨리 독립하고 싶은 이유 중 하나였다. 주말 아침 늘어지게 자고 싶은데 엄마가 밭일이나 집안일을 같이 하자며 깨우는 게 싫었다. 못 들은 척 귀를 닫고 있다가 엄마의 목소리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을 정도로 톤이 높아질 때쯤 마지못해 일어나곤 했다. 멀어서 주말에도 내리 오기 힘든 곳으로 갔어야 됐는데, 공부를 더 열심히 할걸.. 생각했다.


기숙사는 학교의 맨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 지대가 높은 동네인데 하필 산 밑에 학교가 있었다. 교문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는 오르막은 갈수록 경사가 심해져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까지 걸어야 기숙사에 다 달았다.

낯선 곳에서의 나의 첫 방. 4명이서 한 방을 사용하는 공동의 공간이었다. 한쪽 벽면은 두 개의 2층 침대가 머리를 맞대고 있었고, 맞은편에는 책상 4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신입생인 나는 침대 2층을 사용하게 되었다. 독립 첫날밤, 어색함에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분명 들떠 있는 기분인데 좋은 들뜸이 아닌 낯섦에 대한 불안함이었다. 천장은 또 왜 이렇게 코 앞에 와 있을까. 그러다 내가 2층에 붕 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바닥에서 요 깔고 자는 걸 좋아하는 내가 잠을 자려고 사다리를 타고 2층 침대에 올라와 행여라도 떨어질까 봐 벽에 몸을 붙인 채 누워있으니 이상할 법도 했다.

우리 집 천장은 꽤 높았는데,,, 갑자기 눈앞에 부쩍 가까워진 천장이, 높은 침대가, 빳빳한 새 이불이 독립을 실감 나게 했다.

천장 한쪽에 누군가 붙여 놓은 빛바랜 야광 별들이 보였다. 낯섦과 불안을 느낀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구나. 그 아이는 이 자리에 누워 어떤 꿈을 꾸었을까. 빛바랜 별을 보니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조용히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CD플레이어를 꺼내 다시 사다리를 올랐다. 오르내릴 때마다 삐그덕거리는 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거 술 먹다 잘못 발을 딛었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2층 침대는 참 번거로웠다.

라디오를 켜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은은하게 빛나는 야광 별을 보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위안이 되었다.


기숙사의 규율은 고등학교 때보다 더 엄격했다. 규칙을 위반할 때마다 벌점이 주어졌고, 기숙사에서 퇴교를 당할 수도 있었다. 당시 통금시간이 10시였다. 10시가 넘으면 출입문이 닫혀 우리는 창문 틈으로 치킨과 피자를 열심히 넘겨받아야 했다.

새내기가 대학문화에 원활히 적응을 하기에 너무 가혹한 시간 아닌가? 밤의 세계는 10시부터 달아오르는데 말이다. 친구들과 한창 놀다가도 나 혼자 통금시간을 넘기지 않으려고 열나게 오르막을 뛰어가곤 했다. 다행히 구두가 벗겨지는 일은 없었다. 내 인생에 구두를 신고 그렇게 잘 달렸던 적은 그때뿐이다.


분위기에 취해 술을 진탕 먹은 어느 날이었다. 통금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는 기숙사 생활을 하는 같이 친구와 함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동기 남자애가 나를 따라 나왔다. 학기 초라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의외였다. 우리 셋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막을 열심히 올라갔다. 꽤 오래 걸어 술이 깰 법도 한데 오히려 기억이 끊겨 버렸다.

다음날 아침, 쇠도 씹어먹을 싱싱한 나이라 숙취 없이 상쾌하게 일어났다.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친구가 내 방에 찾아와 어제의 일이 기억나냐고 물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억을 더듬어 보니 술집에서 셋이서 같이 나와 걸었고 기숙사에 올라오는 길이생각나지 않을 뿐이었다.

"너 어제 업혀온 거 기억 안 나?"

이게 무슨 말이람. 친구말이 내가 힘들어서 도저히 못 올라가겠다고 중간에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통금시간을 맞추려면 그들은 나를 업고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키가 큰 편인 나를 업고 오르막을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 남자애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때부터였던가. 그 애는 나에게 무척 친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때의 일은 비밀을 지켜 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 때를 기다렸다는 듯 내게 고백을 해왔다.

”너 업고 올라갈 때 힘들었다. 너무 떨려서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더라. “ 면서.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그 뒤로 기숙사의 오르막길을 손잡고 같이 올라갔다.


기숙사의 추억도 많지만 상처도 있었다.

한 번은 기숙사에서 쫓겨날 뻔했던 적도 있다. 그때가 학교 축제 기간이었던 것 같다. 다른 학교는 축제 때 기숙사를 공개하는 행사도 하는데 우리 학교는 예외였다. 그리 좋지도 않은 시설이 무슨 철옹성이라도 되는 듯 항상 문을 닫아놨다.

포항에서 올라온 호기심 많은 친구가 기숙사 내부가 궁금하다며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기숙사에 친구를 데려오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지금의 나라면 사람 사는 곳 별거 없다고 거절했을 텐데 그때는 축제 분위기에 마음이 느슨해졌는지 거절하지 못했다. 잠깐인데 설마 별일이 있겠나 싶어 친구를 데리고 들어가 방을 구경시켜 주었다. 경상도 억양으로 말하는 그 친구의 말소리가 새어나갈까 불안했다.


"누구야"

잠깐인데 별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뒤에서 들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그렇게 사람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느껴지다니. 제 아무리 무섭다는 공포영화를 봐도 그렇지 않을 테다. 기숙사 사감은 왜 꼭 두꺼운 검정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걸까? 뿔테 사이로 치켜세워진 매서운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친구는 도망치듯 기숙사를 빠져나갔고 나만 홀로 사감실로 불려 갔다. 그때부터 사감은 나를 퇴교시키겠다며 협박하기 시작했다. 사감은 친구를 침입자로 여겼고, 나는 중대한 규칙을 어긴 죄인이 되어 혼이 났다.

이 일로 퇴교를 당한다면 내가 저지른 잘못에 비해 너무 큰 처벌을 받는 것 같아 부당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약자였으므로 잘못했다 고사죄할 수밖에.


기숙사에 낯선 이가 들어왔을 때 생길 수 있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규칙을 엄격하게 정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한 번의 잘 못으로 퇴교를 시키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여기서 지금 나가면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그저 그런 공동생활공간인 기숙사에 보여줄 게 뭐 있다고 나는 그 친구를 데리고 왔을까. 아마 그 친구는 기숙사의 공간보다 단체 생활방식이 궁금했고 신기했응 것이다.

다행히 한 학기가 마칠 때까지 기숙사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감은 처음부터 퇴교시킬 마음 없이 그냥 호되게 혼을 내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너무 졸았던 거다.

원래도 친하지 않았던 그 친구와의 관계는 그날 이후로 더 진전되지 못했다.

 

"와 엄마 미쳤다. 우리 엄마 나한테 전화해서 어제 삼천만 원짜리 소파 샀다고 하더라." 친구 무리 속에 있던 그 애가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사감에게 혼났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기숙사에서 퇴교당할까 봐 초조해할 때의 마음을 그 친구가 알기나 할까. 내 상황이었다면 기숙사를 나가면 되지 않냐고 사감에게 당당하게 말했을까.


부모님의 큰 간섭 없이 자유롭게 살아온 나에게 기숙사생활은 여러모로 맞지 않았다. 통금시간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할 수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기숙사는 특정한 시기에만 겪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는데, 스무 살의 나는 내가 다 큰 줄 알고 기숙사를 답답하게만 여긴 것 같다. 결국 나는 한 학기 동안의 기숙사 생활을 청산하고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짐을 빼서 나왔다.


그리고 나의 본격적인 셋방살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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