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한계
"저는 아버지가 아직도 용서가 안 돼요~."
"저는 사실 엄마한테도 미움이 남아있어요. "
"아직도 원망이 남아있어요. "
얼마 전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다시 듣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저 질문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저런 토로가 어느 순간 나에게 많이 멀어져 버렸다.
어리석었던 그 시절의 나는 무엇보다 피해의식이 컸다. 내가 항상 불쌍하고 처량했던 입장을 갖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해야만이 부모님에게 남은 사랑이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착각했던 시절이었다.
한때 즉문즉설뿐만 아니라 상담 관련 프로를 열정적으로 들었던 터라 그때는 모든 사연에 감정 이입을 많이 했고 내가 처한 실제적인 사건보다 더 확장돼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기행도 하곤 했다. 앞서 말한 피해의식에 다른 사람의 사연까지 더하니 더 생떼를 써도 되는 입장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를 항상 그늘에 두고 그늘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며 한탄했다. 그땐 실제 상황도 돌아보면 좀 그러했던 것 같다.
사연 없는 집은 없지만 유독 자신의 사고나 상황에 고립되게 되면 상황이나 사람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무엇보다 사건을 감정적으로 기억한 탓에 그 일은 사건으로서의 의미보다 그 번진 눈물부터 닦아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성인이 아니라 그 시절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이해하는 상황과 세상은 객관적일 수 없고 뭐가 더 옳은지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어른이 된 내 손과 발을 들여다보면서 눈을 떠야 한다.
"이만하면 잘 컸잖아~"
내 머리에 삐죽 나온 흰머리도 발견해야 한다.
"나 이제 어린아이 아니잖아~"
가족을 내 가족으로 인식하기보다 '한 사람'으로 통으로 보기 시작하면 좀 더 입체적인 관계가 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정말로 제각각이라 사랑받고 있다는 영역도 사랑은커녕 사랑의 온기조차 안 느껴지는 헛헛함도 그대로 느껴진다. 그렇다 해도 '내 아버지, 내 어머님'이라는 관념을 지우고 '한 사람으로서의 남자, 여자'로 인식하게 되면 냉정한 듯싶어도 그게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하는 통로가 된다.
사랑의 이해라는 것은 그 사람의 한계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한계를 알면서도 허용할 수 있는 자리가 사랑의 자리 일 것이다.
이해해 보려는 나 자신, 아무리 봐도 이해가 잘 안 되는 가족의 어떤 부분도, 모두 한계를 가진 사람임을 인정하면 더 이상 받아내야 할 사랑의 형태가 없는 것이다.
받아야 할 사랑을 포기하는 것, 내려놓는 것은 오히려 나에게 해방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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