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생각(正見)도 습관이 될 만큼 노력하고 운동처럼 실천해야 하는 일이다.
수많은 생각을 점검하고 돌아보면서 나는 무엇에 집중하는지 어떤 감정에 빠져있는지 내 생각에만 치우쳐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보고 좀 더 바른 방법이 없는지 되돌려보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견해를 들어도 그것이 내 판단인지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휩쓸려 내린 판단인지 자신에게 물어보고 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아주 건강한 습관이다.
흔히들 생각이 많은 것을 탓하거나 나무라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의 생각은 부정적인 견해의 잡념이나 쓸데없이 도움 되지 않는 삿된 의견을 떠올릴 때 하는 말이다. 혹은 너무 이기적인 계산을 많이 해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최대한 채우려 할 때 삿된 '생각'이 많다고 한다. 감정이 앞서면 판단이나 견해보다는 감정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스토리를 갖다 붙인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깔고 스토리를 쓸 때면 감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손해를 많이 보게 된다. 이렇게 감정에 치우쳐 생각한다는 것 자체를 알아채는 연습이 바른 생각의 시작점이 된다.
감정적인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감정은 다루라고 있는 것이지 매번 휘둘리거나 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느껴도 타당한 감정의 표출은 누구나 공감을 하고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잘 다뤄 승화시키는 사람들을 보면서 함께 그 감정에 공감하게 된다. 그 공감에는 자신의 감정적 배출도 함께 이뤄지기 때문에 건강해진다. 글을 쓸 수도 있고 쓴 글을 탐닉적으로 읽을 수도 있다. 내 마음을 읽어주는 것 같은 글귀에서 감동할 수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특정한 장르에 집중 또는 집착한다면 그런 감정적 배출이 필요해서 반복해서 보는 경향이 있다. 감정적인 게 아니라면 자신의 견해의 부족함에서 오는 경우도 있다.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 판단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모르는 것을 배우고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바른 생각의 두 번째 방향성이다.
감정을 넘어서 내가 뭘 알아야 하는지 어떤 태도를 배워야 하는지를 다시금 세우는 일이 바른 생각의 방향성이다. 내가 고민하는 일을 '바르게' 보고 있는지 '바르게' 판단하고 있는지 스스로 고민하는 일은 나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나부터 어떻게 행동하는 게 더 큰 의미에서 나은 행동인지 고민하는 습관이 살아가는 데에 인간다움에 기여하는 일이 된다.
우리는 '집단 무의식'의 바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 집단의 개개인으로서 자신을 되돌려 바른 생각을 하려 애쓰는 것 자체가 공동을 위한 '선'이 된다. 하나의 물줄기가 너나없이 함께 하다 보면 시냇물에서 바다가 되는 것처럼 넓어진다.
너무 바르게만 자라면 재미가 없다고 한다. 그렇게 바른 생각은 멋이 없다는 편견이 있다. 사춘기 시절에는 약간의 삐딱함이 카타르시스를 일으키기도 하고 멋있게 보이기도 한다. 그 멋도 그 사람이 가진 바른 생각의 바운더리가 있을 때 매력으로 보인다. 그 바른 생각의 바운더리가 끊어진 사람은 모두가 피해 다니는 그저 삐딱한 누군가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의 생각을 다듬고 감정을 다룬 사람만이 나이가 들었을 때 가질 수 있는 고아함이 있다. 누구나에게 있는 고아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바른 생각을 가진 당신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원초적인 힘이 있다.
문득 생각에, 감정에, 특정 사건에 길을 잃어버렸다면 자신의 원초적인 힘을 찾아봐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