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의 속삭임?

by 미니작업실




에고는 여러 갈래로 만들어지는데 지속적인 습관으로 만들어진 경험의 축적으로 만들어지고 또 수많은 보이지 않는 영가(망자)의 영향으로 휘둘리는 경우이다. 이때 영가는 자신의 전생, 조상신도 포함이 된다.


영가(망자)의 영향으로 휘둘릴 때 위험한 경우는 죽음(자살)에 이르기도 하는데 망자인 영가가 죽음을 공포로 여기고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때 몸을 입은 에고는 죽으면 끝난다는 식으로 죽음으로 자꾸 몰고 간다. 이때 술에 취하게 하거나 감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자꾸 현재 의식을 방해하면서 부정적인 방법으로 끌고 간다. 자신이 아는 방식이 그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망자는 대부분 마지막 무의식적 감정을 기억한다. 죽음을 인식조차 못할 경우 살아있다고 믿는 경우도 많다. 이때 산 자에게 붙기도 하고 특정 공간에 돌아다니기도 한다. 살아생전 죽음을 깊게 사유하거나 공부하지 않은 인과라고 해야 한다.


각성이 살아있어서 본성(흔히들 말하는 자신의 영혼)이 이끄는 경우는 살아갈 때, 죽음을 삶의 단계로 보고 죽음이란 단계에 초연한 면이 있다. 삶과 죽음도 쉽게 받아들이고 당연히 죽음 이후의 여정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함부로 '죽음' 또는 굳이 '죽고 싶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는다. 영혼의 입장에서는 죽어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부로 삶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다만 힘든 순간을 점으로 보려 하고 인생을 끝내고 싶을 만큼 아픈 에고를 설득하려 드는 게 영적 자각이다. 본성은 이렇게 불안정한 에고의 주인이기 때문에 에고를 데리고 더 나은 삶을 향해 공부시킨다. 어려운 과제가 오면 과제를 풀게끔 도와주고 쉬운 과제가 와도 겸손한 마음을 갖게 도와준다. 도와준다는 것은 조용한 가르침이라 들떠서 돌아다녀서는 알 수 없다.


명상을 할 때 숨을 고르고 조용히 호흡하듯 그 호흡이 고요할 때 아주 조용한 방법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죽고 싶을 만큼 날뛰는 감정을 다독인다. 파도가 들썩여도 다시 가라앉지 않은 파도가 없듯이 우리의 감정도 끝이 있다. 반응하지 않고 그저 호흡으로 대답해 주면 된다.


에고는 계속 술이나 자극적인 콘텐츠로 끌고 갈 것이다. 친구에게 수다 떨거나 하는 방식으로 이끌 것이다. 영적인 자각이 강한 사람들은 그 순간에도 알아차리지만 연습이 안된 사람에게는 그때 멈추고 돌아서기가 어렵다. 그래서 좀 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자신을 들여다봐야 한다. 오래 보아야 알 수 있다.

내 안에 너무 많은 나가 있지만 또 내 안에 그 누구도 없었음을 발견해야 한다.


그 앎을, 그 자각을 에고를 괴롭히는 망자에게 내가 직접 경험으로 체험으로 알려주는 것이 선이 된다.

에고를 다스리는 것은 내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지만 그 감정이 꼭 내 감정의 전부가 아닌 것을 알면 명상이 좀 더 깊어지고 자신을 더 가볍게 해 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본다는 뜻은 신이 본다는 뜻도 되지만 보이지 않는 영가들에게도 나 스스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나와 나(망자의 에고)를 해방시켜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결론, 자신이 자신을 돌아볼 때 부정적이게 비판하다 결국 '죽음'으로 이끄는 논리는 '에고'이다.

자신을 돌아볼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대처하고 살 것인지' 고민하는 방향성은 '영적 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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