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은 이것이 너무 큰 기쁨이었다가 어느 날은 부족한 게 훤히 보여 부끄러울 때가 있다. 또 너무 비참하다 생각했던 과거가 지금에서야 그때 미리 겪어내길 잘했다는 생각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재산이고 축복이라는데 내게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핵심 결핍이다. 누군가에게는 존재가 없어서 물리적 존재감이 없는 것이 결핍이라면 나에게는 참 오랫동안 아버지가 존재하지만 또 장점과 단점이 분명히 극명한 분이시다. 그렇게 내게는 돌아서면 욱신거리고 아픈 만성 통증을 주시는 분이다. 괄괄한 성격에 거의 같은 결로 힘들게 하지만 여전히 또 새로운 느낌으로 아픔을 주신다. 아프다는 것은 또 내가 기대했다는 반증이다. 그 기대심에 자책을 또 해본다.
나의 예술적 감각은 아빠로부터 물려받았는데 또 그만큼 아픔으로 승화해 나가야 하는 결핍을 가졌다.
아버지는 아주 오랫동안 아버지가 머물다 가실 공간에 대해서 생각했다. 회사를 퇴직하면자연인처럼 시골살이를 하고 싶어 하셨다. 시골살이를 하면서 사람들이 휴양하러 놀러 오실 거라 생각하셨다.
늘 혼자 있고 싶어 하면서도 외로움을 느끼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퇴직 이후에 산골에 집을 지어 살고 계신다. 아버지의 성격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소수였지만 그 정도로 충분히 만족해하셨다. 그렇게 사람들이 놀러 왔고 그렇게 꿈은 이루어졌다. 사실 어머니는 관계를 잘 만들어가시는 분이라 어머니가 가면 손님이 왔고 아버지만 있으면 사람들이 오지 않는 현상도 발견됐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자주 놀러 오길 바랐지만 괄괄했던 성격은 여전히 경계심을 만들어주셨다. 어머니를 뵈러 가야 하지만 아버지가 불편해 가지 않는 날이 많다. 산골의 공간은 딸의 경계심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괄괄한 성격을 받아주면서도 항상 조용히 침묵으로 안아주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공간에 들인 정성보다 관계에 대한 정성을 들이셨다면 저절로 채워졌을 마음의 공허함은 결국 아버지의 숙제로 남겨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과 연민이 동시에 들었던 것 같다.
나의 완벽주의 성격은 가족의 결핍으로 오히려 완성도가 높아졌는지 모른다.
'오십에 읽는 주역' 저자, 강기진 저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주팔자를 완벽하게 만들려고 해도 항상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다. 절대로 다 좋을 수는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 부족함을 지닌 그 자체가 완벽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내 인생도 그러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 내 장점을 들여다보면서 기뻐하다가도 또 나의 결핍을 보면 이상한 수치심이 들었다.
"내가 기뻐할 자격이 있는가?"
"내가 뿌듯할 자격이 있는가?"
내 그늘, 내 결핍이 너무 도드라져 보였다.
그 결핍을 도드라지게 바라보는 시선도 어쩌면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인 것이다.
이런 재투성이인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반듯한 면만 드러내고 싶은 시대이지만 나의 결핍은 드러내면서 편해지는 자유를 누려본다. 조급한 시선으로 보면 느리게 변하는 것 같지만 또 부족한 점은 드러나고 더 부족한 부분은 세상을 살아내며 채워질 것이다. 요즘 시대에 조금 유리한 모습으로 세팅된 시작점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그만큼 보완하고 채워나가려 애쓰는 과정에서 오는 기쁨과 뿌듯함이 있을 것이다. 이런 비슷한 결핍감과 성장해 가려는 과정에 공감이 가고 동지애를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 분명히 오늘의 답답함은 온데간데없고 후련함으로 맞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