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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히 Aug 27. 2022

골목 옆 선인장 밭, 월령

날카로운 잎사귀와 동그란 열매

우리가 머문 숙소는 제주도에서도 선인장 군락지로 유명한 월령이었다. 지도상으로는 한림읍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바다에 비친 달이 예뻐 내 나름대로 '달그림자'라는 뜻을 가진 '월령(月影)'이라는 생각을 종종 해봤다. 월령은 손바닥만 한 선인장들이 아름답게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멋진 마을이다. 그도 그럴 것이 크지 않은 규모의 마을 곳곳에 선인장 밭이 옹기종기 모여있기도 하거니와 독특한 색감의 현무암이 빼곡한 해안가 쪽에 자리 잡은 선인장 군락지는 그야말로 절경이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도보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이 멋진 선인장 군락지는 제주 올레길 14코스와도 맞닿아있는 길이다 보니 올레길을 따라 여행을 하는 사람들도 찾아오고, 바로 옆 한적한 한림 해변을 방문한 사람들도 삼삼오오 넘어와 절경을 구경하고 가는 마을이기도 하다.


제주의 서쪽은 한림 해변과 협재해변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푸른 바다를 보기 위해 많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몇 해 전 한 방송에서는 제주 서쪽 부근의 마을 중 하나인 소길리를 배경으로 한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되면서 서쪽 지역의 바다뿐만 아니라 조금 더 내륙 지역까지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령은 아직까지는 관광객의 수가 많지 않은, 소수의 아는 사람들 정도만 알음알음 방문하는 마을의 이미지가 아직 남아있다. 월령의 초입쯤에 위치해 있었던 우리 숙소 근처에서는 관광객이 자주 보이지 않았던 것도 한림 해변에서 차를 타고 5분 정도를 더 들어와야 월령이 나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보기도 한다. 



월령 바닷가 부근에는 여느 제주 해변이 그렇듯 몇몇의 맛집 식당들과 카페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중에 우연찮게 들리게 된 가게가 하나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었던 tvN의 신서유기에서 번외로 제작했던 '강식당'의 제주 편을 촬영한 곳이다. 당시 방송에서는 큼직한 덩치의 강호동과 자그마한 이수근의 모습을 빗댄 돈가스 경양식집을 운영했더랬다. 그래서 나는 이 가게를 발견하고 당연히 돈가스를 파는 가게라고 생각했는데, 원래 이 가게의 메인 음식은 제주 향토 음식이었다. 바다내음이 물씬 나는 다양한 해산물로 만들어진 각종 음식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생각했던 돈가스는 아니었지만 향토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되어 해산물 라면을 포함해 몇몇의 메뉴를 먹어보고는 '지인이 제주도에 놀러 오면 이곳에 데려오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제주도에 놀러 온 지인 커플을 데려가 아침 해장 라면을 사주기도 했다.) 이 식당을 언급한 이유는 월령의 아름다운 바닷길을 만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 앞에 마련된 주차장 한편에서 선인장 군락지 해변길을 걷기 시작할 수 있는데 (물론 정식 입구는 조금 더 옆에 따로 있지만!) 여기서 거니는 산책이 아주 일품이었다. 비록 매일매일 여러 일정으로 산책을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지나쳐 가는 와중에도 선인장 군락지 너머의 바다와 수평선은 늘 아름다웠다.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황홀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이 멋진 길을 더 많은 사람이 만나봤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관광지가 되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도 있었다. 좋은 곳과 맛있는 것은 나만 알고 싶은 이상한 욕심이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마을의 길 끝자락에 있던 식당. 나는 한치덮밥을, 남편은 흑돼지 라면을 좋아했다.


제주도의 선인장에 대해서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족히 10년 전으로 생각되는 과거의 언젠가, 제주도에 방문했을 때 백년초 초콜릿이라는 기념품을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맛있었고 색깔도 너무 고왔던 적이 있었다. 그 후로도 제주도에 갈 때면 판매되는 무수히 많은 초콜릿 중에서 백년초 초콜릿은 빼놓지 않고 늘 구입했었다. 보라색과 자주색 그 사이 어딘가의 영롱하고 사뭇 고급스러움마저 느껴지는 백년초에 마음을 온통 빼앗긴 탓에 백년초 초콜릿은 지금도 기회만 된다면 먹고 싶은 간식 중에 하나가 됐다. 그렇게 백년초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초콜릿이 차지하는 비중이 100% 였기 때문에 백년초 = 초콜릿은 어찌 보면 당연한 공식처럼 나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제주도의 어느 지역에서 이런 백년초가 자라는 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왜 그런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맛있게 먹었다면 '제주도에는 백년초라는 선인장이 어딘가에서 자라는가 보군!'이라는 호기심을 한 번쯤 가질 법도 한데 말이다. 각설하고, 이 백년초 선인장으로 만들어진 음식은 비단 초콜릿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배달음식이 많지 않은 우리의 숙소 바로 앞에는 한 수제버거집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백년초가 들어간 햄버거가 있었다. 평소 패스트푸드라면 가리지 않고 찾아먹는 나였기 때문에 이 백년초 햄버거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나란 참새는 햄버거집이라는 방앗간을 그냥 넘기지 않았고, 결국 남편을 꼬드겨 든든한 점심으로 햄버거를 한입 맛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두툼하고 맛있는 고기 패티에 새콤달콤한 소스까지 곁들여진 햄버거는 그야말로 내 입맛은 제대로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햄버거와 더불어 그 가게에서는 백년초로 담근 술도 판매가 되고 있었는데 임신 7,8개월 차인 나로서는 술은 입에도 댈 수 없었기 때문에 현지에서 판매되던 그 술을 맛보지는 못했다. 이제야 하는 이야기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백년초 술을 한 모금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굳이 따지고 보면 월령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작년 2월, 아직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오기에는 조금은 쌀쌀했던 연초에 엄마와 언니, 귀여운 조카와 함께 3박 4일 제주도 여행을 온 적이 있었다. 10년이 훌쩍 넘는 오랜 회사생활을 끝마치고 식구들과 도란도란 여행을 오게 된 것인데, 그때 머물렀던 숙소가 이번 우리의 숙소 바로 길 건너편에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머무는 숙소가 월령 인지도 모르고 그저 '한림읍 어딘가'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때 숙소로 들어가던 초입에 백년초 햄버거 가게가 있었던 게 불현듯이 생각나면서 그때도 지금도 나는 무의식 중에 월령에 끌리는 사람이었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월령을 포함한 제주도의 서쪽에는 거대한 풍력발전기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월령에서도 이 커다란 풍력발전기를 볼 수 있다. 붉은 노을이 지는 저녁, 힘차게 돌아가는 발전기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자유로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얼마나 바람이 세길래 저 큰 기계가 돌아가는 걸까 하는 갑작스러운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한다. (바람이 불어서 동력을 발생시킨다고 하니까 생기는 그런 자연스러운 호기심이 아닐까?라는 나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이라고 대답하던 남편의 동그란 눈빛이 문득 떠오른다.) 아무튼, 이 풍력발전기는 은근히 서쪽 바다의 그럴싸한 풍경을 만들어주곤 하는데, 사진의 배경으로 이 발전기가 찍혀있으면 왠지 그럴싸하고 멋져 보이기 때문이다. 그냥 전기를 만들어 주는 발전기일 뿐인데 똥손이 찍어도 그럴싸한 사진을 만들어 준다니 그 존재만으로도 너무 고맙지 않은가! 심지어 무수한 선인장과 파란 바다 너머에서 윙윙 돌아가는 풍력발전기가 함께 담긴 사진은 당장이라도 그 파란 바다로 뛰어들고 싶을 만큼 멋지게 찍히고 만다. 기어이 내가 제주도를 그리워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풍력발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제주 서쪽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이 유독 멋있는 경우가 왕왕 있더랬다. 물론 동서남북 모두 아름다운 바다를 품은 제주도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그래도 왠지 내가 머무는 동네가 조금은 더 예쁘고 조금은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발 디디고 내가 잠을 청하는 이 작달막한 동네에서 지내다 보니 도시와는 사뭇 다른 이질감에 낯선 감정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낯섦에서 오는 뭔지 모를 푸근함과 따뜻함은 선인장과, 선인장이 피어있는 골목과, 골목 뒤로 꼿꼿하게 서있던 그 풍력발전기 때문이었으리라.


월령에 있던 숙소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인테리어였다. (응?) 거의 열 달 전에 예약해놓고, 심지어 한달살이 기간이 한참 남았던 어느 휴가철에 '우리가 지낼 숙소를 미리 가보자'는 남편의 말에 미리 마을과 숙소를 사전답사까지 했던 우리였다. 인테리어가 맘에 들어 고른 숙소였는데, 결과적으로 위치도 좋고 동네도 좋고 무엇 하나 빠질 곳이 없었던 숙소였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아련함은 우리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 날 아침 창문 밖으로 들리는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에 블라인드 너머를 살짝 들여다보니 몇 달 전 이 숙소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는 3명의 가족들이 마당에 살짝 들어와 '여기서 한 달 동안 지냈던 거 기억나?' 라며 아이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기념사진을 찍고 가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중에 우리도 제주도에 다시 오게 된다면 이곳을 찾아 저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가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는 둘이 아닌 귀여운 우리 아가까지 세명이 찾아오지 않을까 한다. 제주에서 지낸 한 달 동안의 시간 동안 내 뱃속에서 함께 제주도를 겪었던 귀여운 아이까지 다시 한번 이곳 월령을 찾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참 의미 있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월령의 초입에 있던 우리의 숙소. 아기자기한 마당의 조경마저도 사랑스럽던 그 곳.
월령의 선인장을 모티브로 한 스타벅스의 케이크마저도 귀엽다. 선인장은 초콜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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