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슬로베니아 ::: 블레드
#1. 블레드 호수? - 미니양
정겨운 버스에서 내려 루블라냐에 도착했다. 원래 생각은 이틀 동안 이곳에 머무는 것이었다.
사실 나의 여행 스타일은 매우 느긋한 편이다. 도시의 관광명소라는 곳들을 꼭 봐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고, 무엇인가를 얻고 느껴야 한다는 절박함도 나와는 조금 거리가 멀다. 그저 내가 살던 세상 바깥의 다른 세상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그들의 삶이 간직한 역사와 문화의 차이가 일구어내는 이질감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다. 남들이, 그리고 사회가 선과 악을 정해놓고 그것을 내게 강요하는 시공간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그저 여기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느껴지는 순간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여행 스타일. 우리 엄마는 어떤 생각일까? 어쩌면 이번 생애에서는 마지막 유럽 여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무엇인가 하나라도 더 눈에 담고 싶어 하지는 않을까? 그래서 블레드에 잠시 다녀오기로 했다.
#2. 흐린 겨울의 블레드 - 미니양
루블라냐 버스 터미널에서 블레드로 가는 버스 티켓을 끊었다. 그런데 원래는 6.3유로인데, 자리 배정을 해주며 1.5유로를 더 달라고 하네? 어쩔 수 없이 돈을 지불하기는 하는데, 관광객이라고 바가지 씌우는 게 너무 눈에 보여 당신들. 지금 버스에 이렇게 남는 자리 많은 게 뻔히 보이잖아. 이따가 돌아갈 때는 버스기사 아저씨한테 직접 티켓을 끊어야겠다.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블레드는 탁 트인 전경과 평화로운 자연이 함께 담겨있는, 극동아시아에서 한평생 살아온 나에게는 마치 영화나 사진을 통해서만 살짝 엿볼 수 있는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날씨가 좋을 때는 정말 예쁘다고 하는데, 흐린 겨울의 블레드 역시 충분히 아름답다.
잔잔한 호수와 조용히 시간을 쓸어내리는 나무들, 아마도 여기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군가와 다투고 경쟁하기보다는 함께 행복해지는 방법을 고민할 것만 같다.누군가는 블레드 호수를 한국의 청평호와 비슷하다고 기록해놓았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것은 러브호텔 가득한 청평호와는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손을 잡고 걷거나, 아니면 홀로 사색하며 걷기 좋은 호숫가를 청평호는 일찌감치 잃어버렸기 때문이다.그러고 보면 청평호는 왜 그렇게 러브호텔들로 한가득하게 되어버렸을까? 그곳에 사랑을 나누기 위해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럼 사람들은 왜 사랑을 나누기 위해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떨어진 어딘가로 숨어들어가야만 하는 걸까?
호수를 둘러보고 내려와 시내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슬로베니아 전통 케익과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곰이 뭔가를 먹고 있는 그림이 간판에 그려져 있는 조금 촌스럽다는 느낌의 카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더욱 정감이 가는 공간이다. 이렇게 앉아 있다 보니 여행을 갈 때면 가끔 드는 생각이 다시 문득 스며들어온다.
만약 내가 여기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물론 그렇다면 그건 지금의 ‘나’가 아닐 테지. 그건 외모도, 이름도, 그리고 성격도 전혀 다른데다가 ‘나’의 삶과는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면서 현재에 도달해있는 전혀 다른 누군가일 것이다. 아마 그런 생각이 드는 건, 그들과는 다른 ‘나’를 피부로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카페에서 나와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니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나는 오늘 이런 생각들과 함께 이런 여행을 했다. 엄마는 어떤 생각과 느낌으로 오늘을 여행했을까?
#2. 메마른 겨울의 서울- 고래군
조금씩 혼자 지내는 것이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일상을 살고, 일상을 걷는 일은 언제나 대부분 누군가와 마주치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내 스스로가 ‘나’라고 느끼는 모습을 멋쩍게 보여주고, 또 바라봐주는 사람은 결코 흔치 않은 법이다. 차가운 바람이 훅 하고 불어와 얼굴을 메마르게 쓰다듬고 지나간다. 그녀가 있는 그 곳의 바람은 여기처럼 차가울까? 유럽은 여름이 건조하고 겨울이 습하다던데, 그럼 그곳의 겨울은 여기와는 다르겠지.이렇게든 저렇게든 어쨌든 나 역시 이곳에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냥 이렇게 살다 보면 다시 그녀를 만나 함께 손을 잡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일단 밥이나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