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를 보여주는 산뜻한 방식, 그러나 뻔한 훈계
2019년 2월 13일 개봉하는 영화 <증인>은 호화로운 캐스팅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무대 위에 올라가기 전부터 대중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듯하다. 호화 캐스팅의 중심에는 정우성과 김향기가 있다. 정우성이야 말할 나위 없고, 영화 <신과함께> 시리즈를 통해 기대 받는 배우로 발돋움한 김향기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듯하다. 여기에 드라마 <비밀의 숲>과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등을 통해 인지도를 쌓은 이규형, 베테랑 배우들인 김종수와 박근형, 송윤아, 염혜란, 장영남, 정원중 등이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일단 영화 <증인>은 한국에서는 드물게 시나리오와 영화감독이 분리된 작품이다. 시나리오는 2016년 제5회 롯데시나리오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문지원의 작품이다. 여기에 로맨스와 드라마 장르의 작품들을 만들어온 이한 감독이 각색하고 감독을 맡았다.
신선한 소재, 빛나는 표현
영화는 살인사건의 피의자인 ‘미란’(염혜란 분)의 재판 과정을 메인플롯으로 삼는다. 한국의 진보적인 변호사 모임인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몸담았다가 가난을 이기지 못한 변호사 ‘순호’(정우성 분)는 대형 로펌에 취업한다. 속물적인 로펌의 대표 ‘병우’(정원중 분)가 이 사건에 국선변호인으로 선정되면서 순호 역시 이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지우’(김향기 분). 자폐 증상을 지닌 가족이 있는 초임 검사 ‘희중’(이규형 분)가 지우의 증언을 토대로 이 사건을 기소하게 된다.
여기에 거대 자본을 가진 대기업의 ‘생리대 발암물질 사건’ 재판, 지우가 학교 등 일상생활에서 겪어야만 하는 차별 등에 대한 이야기가 서브플롯으로서 병치된다. 이를 통해 영화는 천박한 한국 자본주의, 기형적인 한국의 교육 제도와 왕따 문제 등을 스치듯 드러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영화는 대체로 메일플롯에 온전히 집중한다. 감춰져 있던 진실이 명철하고 정의로운 주인공에 의해 온전히 세상에 드러나게 되고, 결국 악한 자들은 처벌받게 된다는 주제는 어쩌면 지나치게 평범할 수도 있다. 영화 <증인>이 빛나는 지점은 이와 같은 흔한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다. 사건의 은폐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마련된 것이 다름 아닌 ‘자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영화의 형식인 ‘소통’이, 그 자체로서 또 하나의 주제로서 독자 또는 관객들 앞에 나타난다. 정리하자면 표면적인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의 배후에, ‘소통’에 대한 영화의 고민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영화 <증인>은 이와 같은 중층적인 주제를 보여주기 위한 배우들의 표현력이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배우 김향기는 어려운 배역을 충실히 소화해내면서 스크린에서 그 누구보다도 반짝거리며 독자 또는 관객들의 의식을 스크린 안으로 흡입하고 있다.
도처에 나타나는 키워드, 소통
이를 위해 영화는 도처에 ‘소통’과 관련된 장치들을 배치한다. 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시퀀스의 공간은 다름 아닌 ‘광화문’이다. 일찌감치 ‘촛불혁명’을 통해 한국의 대중들은 ‘소통’을 통해 ‘불통’을 거부하는 데 성공해내지 않았는가.
주인공 순호는 알츠하이머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아버지 ‘길재’(박근형 분)와 함께 단둘이 살고 있다. 순호의 아버지는 순호가 나이를 들어가면서도 결혼하지 않는다며, 어떻게든 혼인하라고 재촉하기만 한다. 순호는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그런 아버지의 요청을 거부하며 갈등을 보인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진심은 순호의 생일날 아버지가 손으로 쓴 편지 한 통을 통해 해소된다.
흔히 법정에서 대립 관계로 나타나는 검사 희중과 변호사 순호의 관계도 심상치 않다. 첫 공판에서 긴장하는 희중에게 순호가 조언을 건네고, 증인을 만나기 위한 방법을 찾는 순호에게 희중이 조언을 건넨다. 상호간의 배려와 소통을 통해 각자는 부족하거나 혹은 필요한 무엇인가를 채워나갈 수 있게 된다. 특히 사건의 증인인 지우를 만나기 위해 방법을 묻는 순호에게 조언하는 희중의 대사, ‘그 사람의 세계 안으로 당신이 들어가면 된다’는 대사 이 영화의 배후 주제가 불현 듯 나타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소통에 관한 영화의 관심은 공간적으로도 나타난다. 지우의 동네에는 신문배급소가 하나가 두어 차례 스크린에 노출된다. 그런데 첫 번째에는 성향 면에서 양극단으로 여겨지는 ‘경향신문’과 ‘조선일보’의 표지가 함께 나타난다. 다음에 나타날 때는 더 많은 언론사들의 이름이 함께 나타난다. 이는 일단 일상적인 생활의 공간에는 언제나 다양한 견해와 가치관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독자 또는 관객들의 무의식에 호소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영화적 장치로 볼 수 있다. 동시에 그 건너편에 나타나는 상호간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순호와 지우 사이의 관계의 이미지에, 양극단 사이에 존재한다고 상상되는 갈등과 대립의 반의적 의미를 부여하는 영화적 장치로도 작용한다.
뻔한 훈계? 그래도 남는 진한 감동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화의 결말은 다소 아쉬움을 남기고 만다. 순호가 법정에서 영화의 주제를 조곤조곤 설명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결국 독자 또는 관객들을 계몽하고자 ‘훈계’하는 이야기 구조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서사가 진행되는 내내 ‘보여주는’ 것에 성공해놓고, 막판에 왜 그렇게나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인지 하는 아쉬움이 남게 된다.
게다가 옛 민변 동료에게 고백하는 에필로그는 사족으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주제와는 별 관련성도 없고, 차라리 비워두었어도 좋았을 부분을 굳이 꾸역꾸역 채워놓은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영화의 표면적 주제인 ‘정의란 무엇인가’와 배후 주제인 ‘이해와 소통’이 맞닿는 지점이었던, 지우가 순호에게 받은 생일선물을 뜯어보는 지점에서 마침표를 찍었다면 좀 더 여운이 남지 않았을까.
원래 시나리오가 어떠했는지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점이 원작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이한 감독이 참여한 각색 과정에 의한 것인지 역시 확인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 영화 <증인>의 결말 부분은 그 자체로 영화의 한계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영화 <증인>은 이와 같은 작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 특히 꽤나 힘을 빼면서 자연스러워진 연기를 보여준 정우성과, 스크린 위에서 누구보다도 빛나는 김향기의 뛰어난 표현력은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충분한 매력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에 섬뜩한 양면성을 보여준 염혜란을 비롯한 다른 배우들의 연기 또한 흠잡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나다. 이야기 구조 역시 주제를 온전히 전달하는 데 비교적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덕분에 막판에 꽤나 반감되었음에도, 다행히 영화가 전하는 여운이 제법 남게 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정의’나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면서 말이다. 일제강점기에서 시작되어 한국전쟁과 군부독재라는 시기를 관통하는 동안,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천민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으면서, 어쩌면 우리는 돈이 된다면 진실이나 선량함 정도는 좀 팔아도 괜찮으며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이 그렇기 때문이라는 ‘천박함’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우가 순호에게,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