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같은 아름다운 성장 ‘판타지’
미국의 영화감독 마이클 수시Michael Sucsy의 작품 <에브리 데이>(Every Day, 2018)이 2018년 10월 11일 한국에서도 개봉한다. 이번 영화는 미국의 소설가 데이빗 레비선David Levithan의 동명의 작품 <Every Day>를 각색한 작품이다. 사랑스러운 16세 소녀 ‘리아넌’(Rhiannon, 앵거리 라이스Angourie Rice 분)이, 매일 아침마다 다른 사람들의 ‘몸’으로 깨어나는 방황하는 미지의 영혼 ‘A’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단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이 감독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마이클 수시는 1975년 제작된 동명의 다큐멘터리 필름을 기반으로 하는 HBO의 TV 영화 <그레이 가든스>(Grey Gardens, 2009)로 미국 내에서는 관객들과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이미 그 이름을 널리 알린 프로듀서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다. 당시 주연을 맡았던 드류 배리모어(Drew Barrymore, Little Edie 역)나 제시카 랭 (Jessica Lange, Big Edie 역)을 비롯한 출연 배우들의 연기들 또한 호평을 받으면서, 이 작품은 그 해 텔레비전평론가협회 작품상을 수상했고 제61회 프라임타임 에미 어워즈(The 61st Primetime Emmy Awards)에서는 텔레비전영화 부문 전 영역에 걸쳐 노미네이트되는 기록도 세우게 되었다. (수상은 여섯 개 부문.) 그러나 이후 그의 작품 <The Vows>(2012)과 함께 미처 소개되지 못하면서, 아직까지는 한국의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는 여전히 꽤나 낯선 감독으로 남게 되었다.
표면: 소녀의 성장 이야기
A는 매일 다른 10대 소년/소녀의 몸으로 깨어난다. 어느 날 A는 저스틴(Justin, 저스티스 스미스 Justice Smith 분)의 몸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몸 주인의 인생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루를 보내고자 노력하는 A는 저스틴이 다니는 고등학교로 등교한다. 학교에 온 남자친구 저스틴을 본 리아넌은 저스틴(/A)에게 다가서고, 그들은 학교에서 빠져나가 행복한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그 날이 지나고 다른 소녀의 몸에서 깨어난 A는 자신이 리아넌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깨닫고, 다시 그녀를 찾아가 그녀에게 저스틴과 헤어질 것을 설득한다. 몸 주인의 성격이 제멋대로인데다, 그는 사실 리아넌을 소중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알기 때문이다.
영화는 리아넌을 학교에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스스로의 삶에 성실하며, 무엇보다도 ‘멋진 미소를 가지고 있는’ 소녀로 그린다. 그리고 저스틴은 그 나이대의 소년들이 흔히 가질 법한 허세에 가득 차 있으며, 연인과의 사랑보다는 친구들과의 의리 같은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사춘기 소년으로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한 리아넌은 저스틴에게 질질 끌려다니기만 한다. 그리고 A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리아넌의 그런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이후 A의 비밀을 알게 된 리아넌 역시 A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A와의 관계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알게 된다. 그러나 잠든 지역 근처에 있는 다른 사람의 몸에서 무작위로 깨어나는 A는 자신의 불안정한 현실, ‘비정상적인’ 상태로 인해 그녀와 헤어질 것을 결심하게 된다.
내러티브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표면적으로 이 영화 <에브리 데이>는 리아넌의 ‘성장영화’이다. 자신감 또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 부족, 타인 의존성 등 눈에 띄는 결함을 가진 캐릭터가, 여러 가지 고난과 갈등을 겪고 난 이후 결말부에 이르면 그러한 결여를 모두 채운 충만한 캐릭터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내면: 소녀의 욕망과 꿈- 판타지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영화의 의도가 단지 16세 소녀의 성장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A가 처음 리아넌을 만나게 된 그 날을 리아넌의 시점에서 상상해보자. 그 날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꿈꾸던 이상형―‘저스틴/A’―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본래의 저스틴이 아니다. ‘저스틴/A’는 리아넌의 욕망에 의해 가공되고 변형된 결과물 혹은 상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저스틴을 향한 리아넌의 욕망은 근사한 외모에 친절하고 자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연인을 ‘만나고-소비하고 싶다’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리아넌은 살면서 한 번도 ‘잘생기고 착한데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남자친구’라는 대상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사실 그 욕망은 그녀가 스스로 형성했다기보다는, ‘/A’라는 기호가 암시하는 것처럼 책이나 TV 또는 영화나 잡지 등의 미디어 내지는 문화적 사회적 환경이 그녀를 통해 재생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A는 분명 존재하지만 결코 그 실체를 만지거나 볼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일종의 ‘유령’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존재하지만 인식할 수 없는 대상 ‘A’를 인식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심지어 사랑에 빠지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영화 <에브리 데이>는 일종의 꿈이나 환상에 대한 기록물이 된다. 우리는 꿈이나 환상에 대한 이야기에 이런 명칭을 붙인다. ‘판타지’라고 말이다.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유령 A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영화 <에브리 데이>의 개연성이나 인과성이 부족한 이유, 그리고 현실성이 결여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A가 ‘알렉산더’(Alexander, 오웬 티그Owen Teague 분)의 몸을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느닷없이 이별을 선언하는 이유는, 불완전하거나 ‘비정상적인’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 결코 아니라 알렉산더가 바로 리아넌의 욕망(혹은 리아넌을 통해 재생산된 사회적 욕망)에 가장 잘 부합하는 대상(혹은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아넌의 이러한 욕망이 사회적 욕망이라는 점은, 그것이 등장인물 모두의 욕망인 동시에 독자 또는 관객 모두의 욕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A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심지어 리아넌 스스로의 몸으로까지 깨어나는 ‘유령’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미 A는 우리들 안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 ‘Everyday’가 아닌 ‘Every Day’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이 영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Day’들, 즉 모든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