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잔에, 추억 하나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많이 변한 것 중에 하나가 술을 마시는 스타일과 술의 종류이다.
나의 첫 술은 20살이 되자마자 마신 소주였는데, 처음 마신 그 소주는 참 맛이 달았다. 술이 써서 못 마시겠다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난 술이 달더라. 술을 좋아하시고 잘 드셨던 우리 할아버지를 닮았던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시작된 나의 음주 라이프는 참으로 화려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20대 초반 술이랑 무슨 원수지간이라도 되는 듯이 공격적으로 마셔댔다. 술을 마시지 않았던 날은 거의 없었고,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수업도 가고 아르바이트도 가고 그랬다. 술을 마시고 지하철에서 잠이들어 15분이면 갈 거리를 1시간이나 걸려 간 적도 있었다.
그 때는 왜 그렇게 세상 술을 다 마셔버릴 기세로 마시면서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아주 다행인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한 가지는 술을 마시되, 필름은 끊기지 말자는 것이다. 술을 자주 많이 마시더라도 제정신으로 집에 들어가자, 친구들에게 전날 나의 행적을 물어보지 말자는 생각했다. 그렇게 음주라이프를 즐기다 첫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고, 여행을 하면서 점점 나의 음주습관은 바뀌기 시작했다. 여행을 하면서는 부어라 마셔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술을 즐기는 정도로 마시게 되었고, 주종은 소주에서 맥주 그리고 와인으로 편하게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주종으로 변해갔다.
처음에 유럽여행을 가서 와인을 마시는데, 그 때는 그저 와인이 싸니까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주보다도 더 빨리 잠이 몰려와 와인 반병을 다 마시지도 못하고 초저녁부터 쓰러졌다. 14-15도짜리 술 몇 잔에 잠이 들다니... 처음엔 자존심이 약간 상했다. 한동안은 와인을 마시지 않았지만, 점점 여행을 하게 되면서 어느새 와인을 즐겨마시게 되었다. 유럽에서도 남미에서도 가성비가 좋은 술이었기에 ,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들과도 와인 한 잔이면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혼자 안주없이 홀짝거리기에도 참 좋고, 맥주처럼 배가 불러서 먹지 못하는 일도 없고. 물론 와인을 즐겨마실 수 없는 여행지에도 있긴 하지만 그럴 땐 맥주가 있으니까.
요즘 와인을 많이 마시고는 있지만 와인에 대해서는 사실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맛과 향을 찾아 마실 뿐. 그리고 비싸고 고급진 와인은 마셔본 적이 없고, 소주처럼 대중적인 와인에 더 끌린다. 지금 와인이 더 끌리는 이유는 와인을 마시면 여행에서의 추억들이 하나 둘씩 떠올라서가 아닐까?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 하나씩을 켜면서 환상을 보듯이, 오늘도 와인 한 잔에 여행의 추억을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