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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Jun 15. 2021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주변성’과 ‘노동’에 관한 섬세한 연극적 고찰

 대학로에서 모처럼 새로운 <고도를 기다리며>가 선을 보이고 있다. 2021년 6월 10일(목)부터 27일(일)까지 연우소극장에서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이해성 연출)가 상연중인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고도를 기다리며>는 대표적으로 크게 두 가지 버전이 있었다. 하나는 벌써 여러 차례 관람해왔던 극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이며, 다른 하나는 리스본 국립극장에서 보았던 <À espera de Godot(고도를 기다리며)>(David Pereira Bastos 각색, 연출)이었다. 산울림의 <고도…>는 텅 비어있는 무대 위에 외롭게 놓여있는 앙상한 나무 한 그루, 그리고 남루한 의상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초췌한 배우들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연극으로, 지금까지도 나에게는 베케트의 원작을 가장 충실하게 무대화한 작품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반면 후자의 경우 원작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지만, 배우들의 대사와 의상과 무대 구성이 지금 이 시대의 보편적 형식과 일치하게 함으로써 현대인의 내면에 내재하는 공허와 상실, ‘도래-중’인 동시에 항상 지연되는 희망에 대한 기다림의 무한한 반복이라는 구조적 부조리성을 잘 드러내는 연극이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tndm.pt/pt/calendario/a-espera-de-godot-2/)     


 그리고 이번에 만난 <굴뚝을 기다리며>를 통해 세 번째 고도를 만나게 되었다. 고도(Godot)는 ‘굴뚝’이라는 이름을 통해 연극화되었으며, 고고(Gogo)와 디디(Didi)는 각각 ‘누누’와 ‘나나’라는 이름으로 연극을 이끌어간다. 그리고 포조(Pozzo)와 럭키(Lucky)와 소년은 ‘청소’와 ‘미소’와 ‘이소’라는 이름의 노동자로서 차례대로 무대 위에 나타나게 되었다.     



<굴뚝을 기다리며>가 보여주는 세 가지 노동의 형태     


 연극의 시간상 흐름은 3일로 나타난다. 두 주인공 ‘누누’와 ‘나나’는 ‘굴뚝’이 오기를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연극에 나타나는 3일 동안 그들은 하루에 한 번씩 각각 ‘청소’와 ‘미소’, 그리고 ‘이소’를 만나게 된다.     


 ‘청소’는 굴뚝에 매달려 그 내부를 청소하는 굴뚝청소부이다. 그는 나중에 성자가 되기를 꿈꾸는 인물이다. 인도의 수행자이자 저술가인 바바 하리 다스의 책 《성자가 된 청소부》를 연상시키는 ‘청소’는, 성자가 되기 위해 매 순간을 사유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굴뚝을 기다리며>는 ‘청소’를 통해 직접 육체를 움직여 일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노동을 보여준다. 그는 쉬는 날 없이 매일 일하며, 혼자서는 결코 감당하기 어려운 무지막지한 양의 노동을 묵묵히 홀로 해나간다.     


 그런데 다음 날 ‘청소’ 대신 ‘미소’가 나타난다. ‘미소’는 공장주가 ‘청소’를 해고하고 그 자리에 대신 배치한 청소 로봇으로, 인간에게 한없이 친절하고 유쾌한 말을 사용하지만, 인간이 아닌 기계이기 때문에 법의 테두리 바깥으로 벗어난 돌출된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연민이나 동정심 없이 가차 없이 처단하는 캐릭터로서 무대 위에 나타난다.     


 ‘청소’와 다르게 ‘미소’가 보여주는 노동의 형태는 일종의 ‘기계성’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이를 통해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최근 대두되고 있는 인공지능(A.I.)의 발전과 로봇에 의해 인간노동이 점차 대체되어가는 흐름이다. 하지만 ‘미소’ 또한 배우의 신체라는 인간의 형태로서 나타난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미소’가 보여주는 행위들은 패권을 가진 이데올로기가 규정하는 법과 규칙에 대하여 무비판적으로 동조하거나 또는 그저 방관하고 침묵하기만 하는 소시민, 즉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극적 반영으로도 볼 수 있게 된다.     


 마지막 날 나타나는 ‘이소’는 극장 외부에서 내부로 진입하여, 철제 난간과 객석 사이 공간에 위치하는 인물이다. 수많은 신조어들과 “다이소가 아니라 이소”라는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소’는 알바를 통해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20대 이하 젊은 청년 노동자들을 반영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굴뚝을 기다리며>는 ‘이소’를 통해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불안한 고용 형태, 생계를 위해 쉴 수 없는 저임금 등 지금 한국의 사회구조에서 가장 아래쪽에 자리를 잡은 계층이 수행하는 노동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소’는 등장한 그 순간부터 줄곧 극도로 분노한 상태로, 그의 언어와 행위는 내내 공격적이고 거칠게 나타난다. 우리는 아마도 ‘이소’가 보여주는 이와 같은 분노에 대하여, 한국에서 ‘여성’으로서 강요당하는 모순들, 그리고 이미 극도로 진행되어버린 빈부격차에 의해 더 이상 희망을 꿈꿀 수 없는 상태에 처한 새내기 노동자들이 당면한 모순들에 대하여 나타나는 정동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원작에서 소년이 ‘고도’가 결코 오늘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수행하듯, ‘이소’ 또한 ‘굴뚝’이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이소’가 무대 뒤로 사라지는 대신 다시 극장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소’는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러 현실 속 어딘가로 떠나고, 남은 연극이 마저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는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다시 저임금의 불안한 노동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주변 혹은 바깥의 무대화     


 <굴뚝을 기다리며>의 핵심은 어쩌면 그 공간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극의 무대가 두꺼운 콘크리트에 의해 중심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차단된 상태의 ‘주변’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무대의 중심부는 두꺼운 회색 콘크리트로 된 거대한 원통형 공장굴뚝이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공장 굴뚝 주변으로 두 사람이 서로 몸을 비껴가야만 지나칠 수 있는 좁은 공간이 마치 먹다 남은 도넛의 일부처럼 굴뚝에 매달려 있다. 70미터 상공에 위치한 그곳은 낡은 철제 난간으로 아슬아슬하게 둘러싸여 있을 뿐이다. 무대와 객석을 가르는 것은 바로 그 낡고 녹슨 철제 난간뿐이다. 그리고 그 난간에 묶인 밧줄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무대 바깥의 객석을 지나 극장의 외부로까지 길게 늘어트려져 있다. 거대한 굴뚝에 매달린 좁은 무대 가장 구석 깊은 곳에는 너덜너덜한 공사용 비닐과 더러운 물이 담긴 페트병들을 청테이프와 녹슨 철사로 엉성하게 얽어 만든 작은 움막 하나가 있다. 움막 앞에는 바닥에는 맑은 물이 든 페트병 여섯 개, 그리고 더러운 물이 든 페트병 수십 개가 놓여 있다.     


 맑은 물이 든 페트병은 아마도 식수처럼 보인다.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그 물은 이제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깨끗한 물이 점점 사라져 갈수록, 이미 늘어서있는, 나중에 오줌이라는 점이 밝혀지는, 더러운 물이 담겨있는 수많은 페트병들은 점점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무대 구성에 의해 관객석에 앉아있는 독자 또는 관객들은 시종일관 콘크리트로 은폐된 중심의 이미지를 목격해야만 하게 된다. 그리고 무대 위에 나타나는 배우들의 신체와 연극적 행위들마저도 철제 난간에 의해 분할되고 훼손된 형태로만 볼 수 있게 된다.     


 결국 <굴뚝을 기다리며>의 무대는 그 자체로 중심이 아닌 주변성을 공간화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 연극에 나타나는 공간성은, 블랑쇼가 바깥(dehors)이라고 불렀던, 일종의 주체도 객체도 아닌 비체(abject)들이 존재하는 영역일지도 모르겠다. 무대 위에 나타나는 배우들과 행위들을 비롯한 연극이 보여주는 일체의 것들이, 거대 담론 또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소외되고 은폐된 영역에 관한 연극적 이미지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독자 또는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두꺼운 벽 바깥에서 일어나는, 그래서 그 중심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원래라면 좀처럼 알 수 없어야만 하는 불편하고도 불쾌한 사건들을 마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연극에서 ‘밧줄’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철제 난간에 묶여서 무대 외부 객석을 가로질러 소극장 바깥 현실세상으로까지 이어지는 밧줄의 존재 양태는, <굴뚝을 기다리며>에 내재하는 주변성을 객석과 나아가 극장 바깥 현실로까지 전이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을 배회하는 언어와 주체성     


 구조주의 언어학은 모든 언어 현상, 즉 기표(signifiant)는 그것이 기의(signifié)와 연결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기호로 작동하게 되며, 각각의 기호는 다른 기호들에 대한 차이를 통해 스스로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굴뚝을 기다리며>의 언어들, 기표들, 즉 인물들의 대사는 단어가 가진 보편적 의미들과 연결되는 데 자꾸만 실패하게 된다. 마치 ‘엄마가방에들어간다’라는 문장에 내재하는 중의성에 의해 의미의 확립이 지연되는 것처럼, ‘누누’와 ‘나나’가 내뱉은 말들은 끊임없이 중심적인 의미를 획득하지 못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자꾸만 단절되고 실패하는 것이다. 요컨대 <굴뚝을 기다리며>에 나타나는 연극의 언어들은 (마치 무대의 공간성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주변부로 밀려나고 부유한다.     


 이 점은 ‘나나’와 ‘누누’의 이름 짓기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들은 상대방의 언어로부터 자기 이름을 가져오고, 다음날이 되면 그것을 망각/상실했다가 다시 상대방의 언어에서 이름을 가져오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타자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구축하고 상실하는 행위는, 첫째로 타자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행위이며, 둘째로 지금-여기에 부재하는 주체성에 대한 초월적(연극적) 경험을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나나’와 ‘누누’의 이러한 실패하는 주체화 행위는 반복을 통해 강화되고 지속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도래-중인 ‘굴뚝’도 결코 도착하지 않는다     


 원작에서도 ‘고도(Godot)’는 결코 오지 않는다. 그저 ‘오고 있는 중’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고도’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 사람이 맞기는 한지, 그 전에 존재하기는 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고도가 오고 있는 중’이라는 것뿐이다.     


 여기에서 ‘고도’의 의미는 하나로 고착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굴뚝을 기다리며>에서 ‘굴뚝’의 의미도 단일한 무엇인가에 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의 이름일 수도 있고, 희망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으며, 혹은 ‘오지 않음’이라는 성질로서 나타나는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굴뚝’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노동이 수행되는 장소인 ‘공장’이 가동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공장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오직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통해서만 공장 내부에서 수많은 노동자들(=노동의 수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굴뚝이 내뿜는 연기는 공장이 살아 숨 쉬는 현상이었고, 자본가 또는 공장주가 잉여가치를 획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굴뚝’은 전통적인 공장-자본주의를 표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해석이 타당하다면, ‘누누’와 ‘나나’가 기다리는 ‘굴뚝’이란 어쩌면 80년대 한국의 노동운동 현장에서 투쟁하던 활동가들이 부르짖던 (사실 그 실체가 아직까지도 모호한) ‘노동해방’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자본주의 체제는 신자유주의를 통해 금융자본주의 단계로까지 나아간 상태이다. 물론 당시에 나타났던 자본-노동 관계의 모순 또한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에 더해 새로운 부조리와 모순 또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간혹 불현듯 만나게 되는 노동운동의 현장을 지나칠 때면, 여전히 그들은 80년대 민중가요를 크게 틀어놓고 오래 된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투쟁의 대상은 이미 떠나버리고 이제는 전혀 다른 대상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 투쟁을 외치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80년대에 머물고 있는 것다고나 할까.     


 어떤 대상이 도착하는 순간, 그 대상의 ‘도래-중’은 더 이상 성립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고도’와 마찬가지로 ‘도래-중’인 상태에 있는 ‘굴뚝’도 결코 도착하지는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는, 이제는 노동운동의 형태도 ‘굴뚝’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무언가를 상상하고 실천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이해성 연출은 2012년 극작가 신명순의 <전하>를 재해석하여 각색한 <전하의 봄>(김승철 연출)의 작가로서 먼저 알게 되었다. 앞서 2011년 국립극단에서 마련한 ‘우리단막극연작’ 중 상연된 신명순의 <전하>(김승철 연출)가, 2012년 <전하의 봄>이라는 장막극으로 새롭게 각색되었던 것이다. 당시 드라마투르그를 맡았던 선생님과 함께 공연을 관람했던 덕분에 더욱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는데, 이번에 연출가로서 무대에 올린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를 만나게 되어서 더욱 반갑고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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