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니고래 Sep 10. 2021

연극 <‘성냥 팔던 소녀’에 대한 보고서>

- 연극적인 모든 것에 대한 연극


  대학로 ‘아름다운 극장’에서 연극 한 편이 상연을 시작했다. 창작극을 발굴하고 무대 위에 올리는 극단 ‘고래’가 추진하는 ‘고래 in, Q!’를 통해, 연극 <‘성냥 팔던 소녀’에 대한 보고서>(전형재 작/연출)가 2021년 9월 8일(수)부터 12일(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무대 위에 올라가게 된 것이다.


  희곡을 쓰고 연출을 맡은 전형재는 연기를 20년 넘게 해온 숙련된 배우인 동시에, <언더스터디>(2016) 등의 작품을 통해 연극계의 주목을 받는 극작가이기도 하다.


연극적인 모든 것에 대한 연극


  연극 <‘성냥 팔던 소녀’에 대한 보고서>는 극이 시작되기도 전에,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들의 오감(五感)을 무대 위로 끌어당긴다. 무대 위에는 서로 멀리 떨어져 각자 누워있는 두 명의 배우가 있다. 서른 중반이 넘는 나이까지 공모전에 낼 희곡을 쓰고 있는 극작가 ‘덕순’(변신영 분), 그리고 여든이 넘는 나이에 귀까지 어두워진 덕순의 늙은 ‘아버지’(전형재 분)가 바로 그들이다. 누워서 잠들어있는 늙은 아버지의 앞에는 틀어놓은 티비에서 뿌옇게 배어 나오는 빛과 함께 소란스러운 소음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그리고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린 시절 언젠가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맡았을 법한 익숙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극이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커다란 냄비에 잔뜩 끓여놓은 콩나물국 냄새다. 그리고 낡은 평상과 냉장고, 옷걸이, 싱크대 등의 거친 표면, 그리고 그 위에 놓여있는 온갖 살림살이들의 형태가 시각을 통해 포착된다. 그리고 시각성의 흐름을 타고 그것들의 표면에 난 거친 질감이 가진 촉각도 함께 흘러들어온다.

맙소사. 아직 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연극 <‘성냥 팔던 소녀’에 대한 보고서>는 벌써부터 연극의 체험에 동원시킬 수 있는 관객들의 모든 감각들을 일찌감치 활성화시켜버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가볍고 편하게 관람할 수 있는 연극은 결코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연극 <‘성냥 팔던 소녀’에 대한 보고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연극적인 것들’을 모조리 무대 위에 펼쳐 보인다. 무대 오른쪽 한구석에 좁게 마련되어 있는 작은 골방에 앉아 글을 쓰는 덕순의 머리 위에는 빔 프로젝터를 통해 덕순이 글을 쓰는 모니터 화면이 띄워져 있다. 그리고 그 가상 화면을 통해 덕순이 극장 바깥 실제 현실의 길거리에 앉아 ‘성냥을 파는 장면’을 담은 영상을 보여준다.


  덕순이 글을 쓰다가 무대 위로 나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글을 쓰는 작가의 내면을 행위를 통해 보여주게 된다. 온몸을 비틀며 바닥을 굴러다니고 작은 의자 아래에 몸을 웅크리며 파고 들어간다. 머리를 쥐어뜯고 먼 곳을 바라보며 자괴감에 빠진다. 백지의 공포를 이겨내야만 하는, 그리고 언제나 결코 완성되지 않는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마감 때문에 점점 피폐해져가는 작가라는 인물의 내면을 무대 위에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뷔히너의 <보이첵(Woyzeck)>이나 이근삼의 <원고지>와 같은, 표현주의적 연극성을 보여준다.


  덕순의 희곡에 등장하는 두 인물을 표현하는 인물이 부자연스러운 동작과 함께 무대에 등장한다. 한 사람은 싱크대로 가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타고, 다른 한 사람은 펜을 입에 물고 신문을 펴들고 바닥에 주저앉아 신문을 본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이러한 시퀀스가 여러 차례 반복된다. 이렇게 동일한 시퀀스가 반복되고, 그 반복을 통해 차이를 생산하는 것은,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부조리극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방식 중 하나이다.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직접 콩나물국을 끓이고 밥과 반찬을 꺼내 먹는다. 두꺼운 천을 덮어둔 콩나물시루에 물을 뿌려주고, 텔레비전에서는 실제 방송이 흘러나온다. 80이 넘는 나이에도 작은 돈에 벌벌 떨면서 쥐고 있는 돈을 결코 내어주지 않는 수전노에 속물인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속물성을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집에 붙어살아야만 하는 작가의 처량한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사실주의극의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불현듯 배우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는 점에서는 음악극, 뮤지컬의 요소가 나타난다. 게다가 덕순의 집이라는 하나의 장소라는 공간의 일치, 연극의 사건이 하루 안에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의 일치, 그리고 연극이 어디까지나 덕순의 글쓰기라는 하나의 행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행위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고전주의 연극의 특징인 ‘3일치 법칙’도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갑자기 등장인물을 연기하던 배우가, 배역으로부터 빠져나와 ‘지금 이 연극을 잠시 중단한 배우’를 연기함으로써 지금 이것이 다름 아닌 연극이라는 점을 독자 또는 관객들이 인식하게끔 만든다는 점에서는 브레히트 식의 서사극적 요소도 나타난다.


  연극은 끊임없이 ‘덕순이 글을 쓰는 극적 공간’과 ‘덕순의 희곡 텍스트 내부의 극적 공간’ 사이를 오고 간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중층적인 ‘극중극’ 형식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덕순이 무대에서 잠시 사라져있는 동안 나머지 배우들이 연극 공간의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서 중층 구조는 삼중 구조로 확장된다. 극중극 형식은 연극에 대한 연극이라는 점에서 대표적인 ‘메타연극’으로 분류되는 것이기도 하다.


  희곡과 연극의 이러한 형식적인 측면을 별개로 하더라도, 연극으로 담아낼 수 있는 ‘연극적인’ 모든 것들을 무대 위에 나열한다는 점에서,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연극 <‘성냥 팔던 소녀’에 대한 보고서>은 ‘연극에 대한 연극’이다.


  그리고 ‘메타-(meta-)’라는 말은 ‘사이에서(among)’라는 단어의 어원과도 관련이 있는 만큼, 연극 <‘성냥 팔던 소녀’에 대한 보고서>도 바로 그 ‘경계’를 매우 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경계와 횡단, 그리고 해체


  연극 <‘성냥 팔던 소녀’에 대한 보고서>는 극중극의 중층 구조뿐만 아니라, 가상 이미지로 재현되는 극장 외부의 ‘현실’과, 실물 이미지로 재현되는 무대 위 극장 내부의 ‘연극’이라는 중층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연극이 보여주는 무대 공간은 ‘현실에 대한 가상 이미지’와 ‘가상에 대한 현실 이미지’ 사이의 경계 그 자체로서의 공간이기도 하다. 즉 이 연극이 보여주는 일체의 행위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이며, 경계의 양쪽을 수없이 오고 간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일종의 해체이기도 하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덕순의 아버지가 접어 날리는 종이비행기이다. 그는 다른 인물들과 별개로 떨어져 앉은 자리에서 종이를 접어 비행기를 만들어 객석을 향해 하나씩 날린다. (안타깝게도 첫날 공연에서 그가 날린 여러 번의 시도 중 객석으로 성공적으로 넘어간 것은 오직 하나 뿐이었지만) 그가 날리는 종이비행기는 배우와 관객 사이에 암묵적인 동시에 명시적으로 실존하는 “제4의 벽”이라는 경계를 한순간 해체해버린다. 관객들의 시선이 종이비행기를 따라 무대에서 경계를 지나 관객석으로까지 함께 이동해버리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종이비행기가 수행하는 해체를 가장 선명하게 체험하는 것은 그 종이비행기를 두 손에 받아드는 관객일지도 모르겠다.


  이 연극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경계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그어져 있다. 반찬통을 꺼내고 넣는 낡은 냉장고는 엄마의 유령이 이승과 저승 사이를 횡단하는 통로이자 경계로 작동한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어머니의 유령의 모습은 오직 딸인 덕순에게만 보인다.


  종이비행기가 무대와 객석 사이를 횡단하고, 덕순은 가상이미지와 현실이미지 사이를 횡단하며, 배우들은 연극의 내부의 허구적 인물의 주체성과 연극 바깥 사이의 주체성 사이를 횡단한다. 아마도 작품의 시놉시스에서 “실제(real)와 허구(virtual), 재현(representation)과 현존(presence)이 공존하는 경계”라고 설명했던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a.k.a. 너희가 연극을 아느냐 (feat. 전형재)


  연극성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것들을 총망라하는 연극, 그리고 연극이 보여줄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모두 보여주려고 하는 연극. 연극 <‘성냥 팔던 소녀’에 대한 보고서>는 ‘작가에 대한 연극’이며 ‘희곡에 대한 연극’인 동시에 ‘배우에 대한 연극’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연극에 대한 연극’이 된다.


  연극은 덕순이 희곡을 완성하게 되자, 길거리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파는 ‘성냥’의 자리에 그 ‘희곡’이 대신 위치하게 되는 결론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것을 ‘성냥’의 여러 가지 특징들을 ‘희곡’으로 전이시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작가이자 연출가가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도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에게 ‘희곡’ ‘연극’이란, 예전에는 매우 유용했고 때로는 간절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그다지 필요하지는 않거나 또는 추억을 환기시키거나 소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정도의 무언가가 되어버린 것이냐고.


  반어적으로 연극 <‘성냥 팔던 소녀’에 대한 보고서>에서 그것을 묻는 목소리는, 연극을 포함하는 예술을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연극으로만 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과 여러 개의 경계와 횡단을 들여다 볼 수 있고, 게다가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반성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들리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연극이 시작되기 전부터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의미 없는 소음과 빛이 덕순이 영혼을 갈아 넣어 한 글자 한 글자 간신히 채워 넣는 원고의 반대편에 위치해있던 것이 그러한 비판 정신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연극 <‘성냥 팔던 소녀’에 대한 보고서>는, 사유하고 판단하기를 정지해린 채 소란스러운 자극에만 철저하게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다소 버거운 연극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에서 성냥을 팔던 소녀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추위로 인해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연극은 이제 성냥 대신 “희곡 팔아요.”를 외치는 덕순도 춥고 외롭다는 것을 보여준다. 희곡과 연극의 죽음은 어쩌면 예정되어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연극 <‘성냥 팔던 소녀’에 대한 보고서>의 메시지, 덕순의 냉소적인 눈빛과 표정이 쓸쓸하고도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쩌면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