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구석에서 떠나는, 여행 아닌 여행
책 『호텔 대신 집에 체크인합니다』,
하리엣 쾨흘러, 이덕임 옮김, 애플북스, 2020.
집구석에서 떠나는, 여행 아닌 여행
코로나(Covid19) 때문에 하루 중 집에 머무는 시간의 비율이 부쩍 늘어났다. 아침 9시 30분경을 시작으로 해서 수시로 울려대는 재난문자, 그리고 여러 매체들을 통해 새로운 확진자의 출현을 알리는 뉴스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아직도 교회에 모여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더러 있기도 한 모양이다. 어쨌든 나와 그녀는 빈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장을 보거나, 아니면 일 때문에 꼭 나가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내고 있다.
어쨌든, 작년 연말 즈음에 급하게 마감 일정이 잡힌 원고를 정신없이 끝내고 나서 한동안 머리를 비운 채 멍한 날을 보내면서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다 책상 한쪽 구석에 몇 주 동안이나 놓여있어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호텔 대신 집에 체크인합니다>. 아이고 세상에! 리뷰를 쓰기로 약속했던 책인데 그만 깜빡 잊고 있었다.
뒤늦게라도 책을 손에 들고 첫 장부터 넘기기 시작했다. 먼저 1부 ‘외로운 행성에서’를 읽는 내내 단정하고 간결한 문체로 밀도 높게 베를린 어느 길거리에 있는 사물을 묘사하는 내용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덕분에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나도 모르게 예전 어느 겨울날 베를린에 며칠 동안 머물던 그 때의 느낌이 의식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책과 함께 베를린 어딘가를 걷는 듯한 환상 속으로 잠겨들게 되었다.
“그 해 겨울 내겐 하루에 한 번 살짝이나마 이탈리아의 분위기를 느끼려는 습관이 생겼다. 새벽 산책이 끝난 후 길모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이탈리아 식품 전문점인 살루메리아에서 카푸치노 한 잔과 파니노(이탈리아식 샌드위치)를 즐기는 것이었다. 가게를 운영하는 시칠리아 출신의 가족이 마음에 들었다. 가장인 니뇨는 매일 아침 신선한 채소 상자를 부엌에 들여놓고 최상의 안티파스토(이탈리아식 전채요리)를 만들어 냈고, 그의 아내 마리아는 언제나 내 접시에 여분의 쿠키를 얹어 주었다. 부부의 두 아들인 카르멜로와 살바토르는 기꺼이 나와 잡담을 나누었을 뿐 아니라 매일 나를 한계 상황까지 몰고 가는 우리 아기를 무척 열정적으로 환대해 주어서 우울감에 시달리는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11)
문득 책 속에 등장하는 ‘니뇨씨가 운영하는 살루메리아’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나는 곧장 컴퓨터를 켜고 스트리트 뷰를 통해 그 가게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책의 내용과 살루메리아 앞 길거리의 이미지들이 겹치면서, 마치 지금 이 순간 내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집 한 구석에 앉아서 이렇게 여행을 하는 방법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니뇨씨가 운영하는 살루메리아’(Salumeria da Nino, Geisbergstraße 14, 10777 Berlin.)에 이어서, 모퉁이에 있는 ‘살루메리아 바로 옆 작은 여행사’(Concept Reisen, Geisbergstraße 14, 10777 Berlin.) 앞에 서서 카탈로그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 순간 그 장소에도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잠시 책을 내려놓고 베를린 가이스베르크슈트라세 여기저기를 산책한 다음 다시 서울에 있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또 이렇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아, 여행 가고 싶다. 베를린도 다시 가보고 싶다.
집에 머무는 여행자를 위한 14가지 지침서
이 책의 2부에는 ‘14일 일정으로 집에 체크인합니다’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그리고 작가는 집에서 머물며 여행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혹은 낯선 경험을 발견하는 14가지 방법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실천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잠깐 이 책의 작가에 대해 함께 알아보기로 하자. 한국에서 발간된 이 책에는 영어식으로 ‘해리엇 쾰러’라고 표기되어 있는, 하리엣 쾨흘러(Harriet Köhler)는 미술사와 저널리즘을 전공한 독일의 작가이다. 그는 방송작가와 레스토랑 평론가로 일하다가 2007년에 소설 <부활절일요일(Ostersonntag)>을 출간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는데, 이 소설은 같은 해 드레스덴 주립 극장에서 연극으로도 공연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소설 <그 다음 이 침묵(Und dann diese Stille)>을 출간했고, 2019년에는 에세이 <집에 있기에 대한 지침서(Gebrauchsanweisung fürs Daheimbleiben)>를 냈다. 그리고 그것이 번역되어 ‘호텔 대신 집에 체크인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출간된 것이다.
여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14가지 방법은, ‘일일째’, ‘이일째’ 등의 순서로 구성되어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각각 집에 머무는 동안 시도해볼 수 있는 개별적인 도전 내지는 실험적 실천의 목록들이다. 따라서 2부의 14가지 항목들은 순서에 상관없이 그날그날 마음이 가는 부분부터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이 책은 코로나 사태가 시작되기 전에 나온 책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안의 내용은 사회적 거리두기나 개인과 모두를 위한 방역 지침과는 별개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요즘처럼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야만 하는 상황에서, 이 책 <호텔 대신 집에 체크인합니다>는 훌쩍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좋아하는 여행자가 마냥 답답해하기만 하다가 새삼스레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경험을 하는 데 어쩌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도 같다. 가까운 곳을 산책하며 사물을 낯설고 새롭게 경험하거나,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집 안의 공간성을 재발견하기를 시도하거나, 또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하는 행동들은 분명 집에 머무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새롭고 흥미로운 도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장하면서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일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두었다. 특별히 화려한 일몰이 아니라면 더 이상 아무런 의도 없이 하늘을 보는 데 몰두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에게 하늘이란 비가 오려 할 때 우산을 준비해야 할지를 확인하는 아날로그 날씨 앱에 지나지 않는다.” (154-155)
작가의 지적대로 어느 순간 하늘을 보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기만 했던 것도 같다. 해가 저물기 전 잠시 집 앞에 나가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건물과 건물 사이 작은 조각으로만 보이는 하늘은 온통 흐린 잿빛 구름에 뒤덮여 있었다. 평소라면 다시 시선을 내려버렸을 테지만, 이번에는 작가가 추천해준 것처럼 조금 더 하늘을 보며 시간이 흐르게 해보았다. 그러자 나는 하늘과 나 사이에 흐르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또 뒤덮은 채 멈춰있는 줄로만 알았던 회색 구름이 사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조각이었으며 또한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소설가답게 이 책 <호텔 대신 집에 체크인합니다>는 자연스러우면서 매끄러운 묘사가 돋보인다. 미술사와 저널리즘을 전공한 영향인지 아니면 독일식 글쓰기가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교적 정확한 인용을 다채롭게 구사하는 점도 눈에 띈다. 그리고 세상의 다양성에 대한 열린 사고와 깊은 사색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간혹 볼 수 있는, 세상과 자기 스스로에 대한 성찰도 엿볼 수 있다. 책이 보여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격리되듯 집에 머무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떠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러야만 하는 여행자들에게는 잠깐 답답함을 잊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들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은 분명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