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소멸과 다른 하나의 출현
한국인 배우 심은경이 주연을 맡은 일본 영화가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을 휩쓸고, 심은경은 이듬해 발표되는 최우수 여우주연상까지도 수상하게 되었다. 일본 영화 <신문기자>(2019)에 관한 이야기이다.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덕분에 영화의 한국 제목이 원제 <新聞記者(Shinbun Kisha)>와 동일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The Journalist>이다. 그리고 사실 ‘신문기자’와 ‘저널리스트’라는 두 단어 사이의 작은 차이에 이 영화의 핵심이 담겨 있다. 한국 언론에서는 대체로 일본 아베 정권에 대한 비판적 내용으로 해석 가능하다는 지점에만 매달리고 있지만, 정작 감독인 후지이 미치히토(藤井道人)는 영화를 통해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소멸해가는 저널리즘
영화 <신문기자>는 언론과 기자들이 과연 저널리즘을 실천하는 저널리스트일까를 묻는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이 질문은 ‘언론’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는 행위이며, 같은 맥락에서 ‘기자’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기자(記者)’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기록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국의 사전에서는 ‘신문, 잡지, 방송 따위에 실을 기사를 취재하여 쓰거나 편집하는 사람.’(네이버 사전)이라고 정의한다.
반면 ‘저널리즘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는 기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저널리즘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취재를 통해 사실을 전달하는 행위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에는 일단 어떤 사실을 보도할 것인가에 관한 선택의 문제가 포함된다. 그리고 보도에 대한 윤리적·정치적 가치의 문제, 즉 정의(正義)란 무엇인가에 관한 문제도 포함된다. 사전은 ‘저널리즘’을 ‘신문과 잡지를 통하여 대중에게 시사적인 정보와 의견을 제공하는 활동’(네이버 사전)이라고 정의하는데, 이를 통해 단순히 기사를 생산하는 활동과 함께 사실에 관한 미디어와 저널리스트의 ‘의견’까지도 포함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신문기자>는 일본에서는 ‘기자’와 ‘저널리스트’는 결코 동의어(同義語)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정치계의 강간 사건 피해자를 일본 내각정보실이 덧글 조작과 각종 공작을 통해 꽃뱀(美人局, Tsutsumotase)으로 몰아가자 대부분의 일본 언론과 기자들이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돕는가 하면, 내각정보실이 인터넷에 마구 뿌려버린 민감한 개인정보를 일본의 언론과 기자들이 그대로 재생산하는 모습까지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반면 감춰진 진실을 쫓는 것은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의 자녀인 ‘요시오카 에리카(吉岡 エリカ, 심은경 분)’ 뿐이다. 그는 일본 신문사에서 일하지만 결코 일본인답지 않은 저널리스트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점은 사실 한국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직접 취재하고 고민해서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보다는, 다른 언론사의 텍스트를 받아서 다시 쓰고 SNS를 뒤적거려 별 가치 없는 텍스트를 생산하느라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는 ‘타자수’들이나, 아무 윤리의식이나 사명감 없이 기사문을 생산하는 ‘기레기’들이 더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현상은 언론사들의 핵심 미디어가 종이에서 온라인으로 옮겨가면서 가속화되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광고홍보회사들과 기업들이 생산하는 광고 텍스트가 ‘보도자료’ 내지는 아예 ‘기사문’의 형태로 게재되는 현상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이 영화를 요약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영화 <신문기자>는 우리에게 ‘기자’라는 용어 대신, 그것을 ‘저널리스트’와 ‘리포터’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고 말이다.
에리카의 혼종성과 일본적 여성성의 출현
요시오카 에리카(吉岡エリカ, 심은경 분)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뉴욕에서 태어나 현재 도쿄 지방의 지역신문사에서 일하는 기자이다. 이 캐릭터 설정에서 우리는 그가 ‘일본’과 ‘한국’과 ‘미국’이라는 서로에 대해 이질적인 세 개의 문화성이 뒤섞인, 일종의 ‘문화적 혼종’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혼종성(hybridity)은 탈식민주의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 중 하나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철학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미국의 인문학자 호미 바바(Homi K. Bhabha)가 제안한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바바는 ‘혼종성’에 대해 지배-피지배 문화 사이 또는 동등한 위계의 두 문화 사이의 경계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보통 각각의 문화권에서 ‘혼혈’이나 ‘잡종’ 등의 기표를 통해 차별의 대상이 되고는 하지만, 사실 이것은 각각의 문화가 은폐하고 있거나 또는 미처 발견(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문화적 요소를 드러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바바는 ‘혼종성’에 대해 차별을 생산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과 새로운 대안을 생산하는 힘이 잠재되어있다고 지적하며, 따라서 이것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다시 에리카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는 일본에서 생활하고 활동하며 일본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영화에 나타나는 그의 이미지는 무척이나 낯설다. 일본 여성 특유의 옷차림, 표정, 언어가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는 줄곧 미국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일본의 ‘보통 여성들’처럼 꾸미고 옷을 골라 입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아직 일본 문화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의 ‘보통 사람들(여성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제스처와 표정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일본어가 서툰 편이기 때문에, 그는 그저 정확히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만 언어를 사용한다. 덕분에 일본의 ‘보통 여성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않는다.
호미 바바의 지적대로라면, 영화 <신문기자>에 나타나는 이 지점이 매우 중요해진다. 에리카의 이질성을 통해 일본에서 그동안 너무나도 당연해서 인식조차 할 수 없었던, 숨어있던 ‘역사적·문화적으로 구성된 여성성’이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그 모습이 드러나 버리기 때문이다.
뭐, ‘역사적·문화적으로 구성된 여성성’이라는 문제는 한국에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여전히 남성들에게 있어 육아와 가사란 ‘돕는 것’이라고 이해되는 편일 테고, 지금 이 순간에서도 수많은 채널들 중 어딘가에서 예능을 비롯한 TV 프로그램들이 (심지어 여성들의 발화를 통해서도)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이나 ‘여성들이 선호하는 스타일’ 같은 언어를 반복하면서, 여성들과 ‘여성성’에 관한 굳건한 담론은 꾸준히 재생산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