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쿠바 ::: 아바나 / 파나마
#1.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자 - 미니양
쿠바로 들어간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떠나는 날이 왔다. 동시에 아날로그적인 삶을 끝내고, 다시 문명의 삶으로 돌아갈 시간이 온 것이다. 마치 어느 만화에서나 경험할 법한 새로운 세계를 모험하고 나온 그런 기분이랄까?
난 그 새로운 세계가 너무 좋았어서 계속 머물고만 싶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날로그적인 삶 때문에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비행기 티켓을 연장하고 싶었지만 전화도, 메일도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원래의 비행 스케줄대로 떠나야했기 때문이다. 공항에 직접 가면 해결 됐겠지만 난 스페인어를 전혀 못하니까 쉽지 않았을 것 같았으니까.
암튼 쿠바를 떠나기 위해 공항 근처(?)행 로컬버스에 몸을 실었다. CUC이 얼마 남지 않아서 택시로 편하게 이동할 생각 같은 건 할 수가 없었다. 전 날 미리 알아둔 깜삐똘리오 옆 버스들이 모여서는 정류장으로 가서 1MN짜리 만원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내 몸 두께 만한 배낭을 메고 버스에 올랐건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서 있기가 힘이 들었다. 하지만 친절한 쿠바 사람들,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배낭을 무릎 위에 올리고 있기엔 가방 무게가 꽤 나갔기에 그냥 고맙다고 인사만 했다. 몇십 분쯤 흘렀을까 사람들은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아바나 시내 외곽으로 나가고 있었다.
처음 아바나에 도착했을 때 봤던 풍경의 기억들을 더듬어 가며, 곧 내려야할 것 같은 마음에 쿠바 사람들에게 "에어뿌에르또!" 라고만 외쳤다. 다른 스페인어는 잘 모르니까. 그치만 그들이 하는 대답을 내가 알아들을리 없고, 그저 분위기로 눈치챌 수 밖에.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말해주겠지. 라는 생각으로 가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다음에 내려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 때까지 만원이었던 버스에서 내리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친절한 아저씨가 내 배낭을 손수 내려주어서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이 후 3터미널까지 다른 버스로 갈아타는 것까지 완수하고 무사히 출발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정말 쿠바를 떠나는구나!
#2. 그리움이 된 나라 - 미니양
2MN으로 공항에 도착했기 때문에 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남겨둔 CUC을 다 쓰기로 했다. 사고 싶었지만 참았던, 맥주 한 캔과 쿠바커피 한 봉지를 사들고 뿌듯한 마음으로 게이트로 향했다. (하지만 면세점에서 더 싸게 팔고 있었다는... 결국 바가지 쓴 꼴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면세점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으니.)
공항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마지막으로 뭘 하나 더 사고 싶은 마음에 지갑을 열었더니 조금의 CUC이 남아 있었다. 쿠바에 대한 미련을 버리 듯 남은 CUC을 다 써버리고 싶었만 내가 살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초콜릿 가게에 가서 돈을 내밀며, 살 수 있는 게 없냐며 물었다. 그랬더니 마음 좋아보이던 공항 직원이 웃으며 초콜릿 한 알을 쥐어주었다. 초콜릿 한 알을 들고 아이처럼 기뻐하는 자신을 보며, 내가 이렇게 작은 것 하나에 기뻐하던 사람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생각해보면 더 큰 것만 가지려고 했던 것 같다. 한국에 돌아가면 지금 이 기쁨을 기억하며 살아야지 했지만, 그새 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글을 쓰면서야 다시 생각났다. 반성해야지.
마지막까지 좋은 기억만 남겨준 쿠바를 떠나는데, 괜시리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쿠바를 경험하기 전엔 막연히 가보고 싶던 나라였고, 쿠바를 경험한 지금은 그리운 나라가 되었다. 언젠가 말레꼰의 여유도, 길거리 피자와 아이스크림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3. 여긴 어디? 난 누구? - 미니양
아바나를 떠나 최종목적지인 칠레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전, 파나마에 내렸다. 파나마 공항에 내려 세상과 접속할 수 있었지만, 왠지 귀찮아졌다. 그 사이 디지털이 낯설어진 느낌이었다. 세상과의 접속은 잠시 미룬 채 우선 파나마 시내에 잠시 가보기로 했다. 산티아고행 비행기 출발시간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았었으니까. 파나마 입국 심사는 지금까지 내가 다녔던 세계 어떤 도시 보다도 오래 걸렸다. 거의 최악의 기다림을 겪고 나서야 파나마 공항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공항 밖으로는 나왔는데, 시간은 4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고, 공항 근처에는 아무 것도 없고... 그냥 시내에 나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런 정보도 없고, 무작정 택시를 타고 중심가로 가달라고 했다. 내린 곳은 그냥 빌딩 숲 한가운데. 여긴 어디? 난 누구?
큰 슈퍼마켓에서 맥주 한 캔이랑 치킨 너겟을 사서 입에 물고 무작정 걸었다. 공항에서 받은 허접한 지도만 의지해서 그냥 걷다가, 바다라도 봐야겠다 싶어 방향을 틀었다. 걷는 사이 해질녘이 되었지만 바다가 보이는 공원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많이 걸어서 힘들었지만 그 곳에서 본 파나마의 노을은 참 예뻤다. 그렇게 노을만 한참을 쳐다보다가 깜깜해지자, 난 다시 파나마 공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버렸다. 비싼 택시비로 갔다 온 것 치곤 제대로 본 것이 없었다. 내가 시내로 나갈 때 택시 안에서 봤던 구시가지와 석양을 본 것이 전부. 그나마 유쾌한 택시 기사 아저씨 덕에 즐겁게 공항에 도착한 것이 위안이 되었다. 짧게나마 파나마 땅에 발을 디뎌본 것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했다.
이제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 산티아고로 간다!
#4. 야! 너어!! - 고래군
갑자기 전화기가 웅웅 소리를 내며 나를 부른다. 화면에 보이는 이름은 보이스톡을 통해 나를 찾는 그녀라는 표시. 반가움에 앞서, 나는 한없이 커다란 안도감에 반쯤 정신을 잃고 말았다.
처음 연결을 누르고 나서,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곧바로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야!! 너 연락도 없이!!"
갑작스레 소리를 지르는 내가 놀라게 했을까? 그녀는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왜 나한테 소리 질러. 난 너무 반가웠는데."
눈물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불같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중간에 한 번은 연락 준다더니, 연락도 전혀 없고. 당신 어머님도 많이 걱정하고 계신단 말이야."
커다란 안도감은 마치 분노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안 것만 같다. 그녀 역시 반가움과 당혹감, 그리고 미안함에 눈물이 나버린 거겠지. 어쨌든 다행이야. 당신, 돌아와서 보자. 반드시 복수해주고야 말테다.
복수할 수 있게, 잘 돌아와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