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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Nov 17. 2015

찬바람이 서글피 우는 호수

2012. 일본 ::: 도야


#1. 아 추워 도야코(洞爺湖)- 고래군


 지고쿠다니 초입에 있는 여행자 정보센터 안에서 도시락을 먹어치운 우리는 다시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또 여행한다. 인세와 지옥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마주한 듯 약간은 먹먹한 기분을 안고 내린 곳은 도야(洞爺)역. 지도를 살펴보니 눈동자를 닮은 아주 커다란 호수가 있고, 그 호수의 이름이 도야코(洞爺湖)이다. 호수 이름을 딴 지명인가보네?


 역 바로 저 앞에는 차가운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아니 사실 바다는 언제나 같은 온도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바다를 만나는 내가 추위에 몸서리치기 때문에, 바다의 느긋함을 외면하는 건 아닐까? 아니 그보다는 이 동네, 어째 유난히 더 춥다. 나 지금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던 것 아니었어? 여기 왜 이리 추워요? 산바람인가? 바닷바람인가? 아니 둘 다이려나?


 우리를 호수까지 데려다 준 것은 낡은 버스였다. 동네 할머니와 할아버지 몇 분, 그리고 버스기사 아저씨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야트막한 산허리를 굽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며 보이는 것은 바다처럼 넓은 호수. 한가운데 섬 하나를 눈동자처럼 머금은 호수의 첫 인상은 장엄하리만큼 커다랗다는 느낌이었다.

 짙은 푸른색의 물이 거대한 그릇에 담겨있는 그 가장자리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추워! 아니 차가워! 아니 춥고 차가운 게 아니라, 우리 여기 오래 있다가는 큰일나겠어요.”


 한기를 못 이기고 체온마저 급격히 떨어지는 느낌은, 진정한 냉기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겠다는 기세로 나를 죽음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지금-여기 나는 있다. 거대한 호수가 뿜어내는 냉기 때문인지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토야코의 도도한 냉막함이 사람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그 적막함이 호수를 더 차갑고 쌀쌀맞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걷다 보니 유람선이 천천히 들어오고 있는 선착장이 보인다. 그리고 선착장을 조금 지나자, 발을 담글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노천온천이 있다. 바람을 막을 수 있게 벽을 두르고, 온기가 쉬이 빠져나가지 않게 천장도 막아놓았다. 가만히 손을 넣어 그 온기를 느껴본다. 두 손을 통해 온 몸에 깊게 밴 냉기가 조금은 옅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오빠, 나 발 담궈볼래!”

“괜찮겠어요? 많이 추운데.”

“물은 따뜻하잖아. 오빠도 발 담궈요.”


 어떻게 할까? 나는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어쩐지 두 발을 담그는 순간, 이곳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마치 차가운 호수의 여왕이 지나치는 여행자들을 영원히 붙잡아두려는 함정처럼 말이야.


“나는 괜찮아요. 그리고 가급적이면 당신도 안 담궜으면 좋겠어.”


 하지만 이미 그녀는 양말까지 벗고는, 두 발을 온기에 묻기 시작했다. 아아,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 지도 몰라. 나도 곁에 앉아 그녀처럼 저 따스함에 조금 더 기대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곧이어 경계심이 다시 뒷목을 스물스물 타고 올라온다. 이대로 영원히 여기 묶여버릴 수는 없어. 그녀를 구해내려면, 나는 지금-여기서 기다려야만 해.


 한껏 발그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다그쳐 그곳에서 꺼냈다. 입고 있던 외투와 상의로 물기를 급히 닦아내고, 양말을 신게 한 다음 신발을 그 위에 다시 신게 만들었다. 이 정도 냉기라면 아주 잠시라도 위험할 수도 있으리라. 아니, 머물고 싶게 만드는 그 위험한 마력을 뿌리친 나에게 호수가 조금이라도 앙심을 품었을까 두려웠다. 나는 그녀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얼른 돌아가자. 정말 너무 추워. 여기는 만약 다시 온다면, 그 때는 반드시 따뜻한 계절일 거야.”


다소 정신이 없어 보였는지, 아니면 평소와는 다소 말투가 달라졌기 때문인지 그녀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오빠, 그렇게나 추워? 뭘 그리 서둘러요?”

“배고파서 그래. 따끈한 우동 국물이 정말 그립다.”


 아니, 사실은 내가 나그네를 영원히 붙들어두려는 호수의 의도를 눈치 챘다는 걸 호수가 알아 버릴까봐 두려웠어. 그랬다가는 더 노골적으로 나를, 그리고 당신을 괴롭힐 것만 같아 두려웠어.


 버스를 타고 도야역 앞에 내린 우리는 길 건너편에 기차역이 보이는 곳에 있는 한 식당에 무작정 들어갔다. 열차 시간이 아직 남아있으니, 내가 아까 말한 우동이라도 먹자며 그녀가 나를 이끈 것이다.

 아직 해가 지려면 한참 걸릴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가게 주인 할머니와, 딸처럼 보이는 여인네는 곧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우동을, 그리고 그녀는 소바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김을 피워 올리는 그릇이 내 앞에 놓였고, 나는 황급하게 젓가락을 움직여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이제는 말해도 될까? 호수의 귀가 여기까지는 닿지 않을 거야.

우동은 한국의 기사식당이나 분식집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뜨거운 국물과 음식으로 위장을 채우고 나니, 추위가 한결 가시는 게 느껴진다. 나 어쩌면 배가 고팠던 걸까? 하긴 점심식사가 그리 든든했던 건 아니었어.

아니지,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어. 최소한 기차에 올라탈 때까지는 조심해야 해.


 그녀가 주문한 소바를 한 입 먹어보았다. 나도 소바를 주문할 걸 그랬나? 우동보다 나은 것 같아. 내 눈빛을 읽었을까? 그녀가 바꿔먹자며 그릇을 바꿨다. 자기도 우동을 먹어보고 싶다며. ‘우동 거의 다 먹었는데?’라는 내 말에, ‘난 이미 배가 불러요.’라고 답하는 그녀.


 그릇을 모두 비우고 나니 기차 시간이 십 분 조금 넘게 남았다. 할머니와 딸처럼 보이는 여인의 대화가 중간중간 귀에 들어왔다. 가게 문을 왜 이리 일찍 닫나 했더니, 친척끼리 모두 모이기 위해 어딘가로 가는 모양이다. 아, 여기는 신년 연휴구나. 한국처럼 음력 설날이 명절이 아니지 참.


 차가운 도야호의 눈길을 등 뒤로 느끼며, 우리는 이제 하코다테로 향해 걸음을 옮긴다.    


    



    





#2. 도야호에 대한 기억 - 미니양


 도야호를 다녀온 지금 그 때를 떠올려보면 ‘너무 추웠다’라는 기억만이 떠오른다. 도야호에는 발을 담글 수 있는 노천온천도 있었고, 산책하기에도 참 좋은 산책로도 있었다. 하지만 추운 날씨가 너무 강렬했기에 추웠던 곳...이라고 기억이 남은 것이다.


 사람의 기억이란 경험한 전부를 기억할 수 없기에, 조금 더 강렬한 기억이 오래 남는 것 같다. 도야호에 대한 ‘춥다’라는 기억이 살짝 안타까웠기에 언젠가 날이 좋은 화창한 여름날 다시 한 번 찾아 느긋하고 여유있게 돌아보고 싶다.


 성급하게 도야호를 스캔하듯 쭉 둘러보고 다시 도야역으로 향했었다. 기차시간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남았고, 도야를 급하게 떠나는 것은 아쉬웠다. 손을 호호 불어가며, 기차역 근처를 걸어보기로 했다. 작은 어촌의 소박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며, 어딘지 모르게 평온한 느낌이 들었다. 마침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풍경으로는 퍽이나 잘 어울렸다. 짧아서, 너무 추워서 아쉬웠던 도야호를 뒤로하고, 우리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하코다테를 향해 기차는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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