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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Nov 26. 2015

흐르는 눈의 하코다테

2012. 일본 ::: 하코다테


#1. 어둠 속의 하코다테- 고래군


 JR 하코다테역에 내릴 무렵,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역사에서 바깥으로 나서기 전, 우리는 무엇보다도 방향을 먼저 찾아야만 했다. 오른쪽? 왼쪽? 그 전에, 지금-여기는 어디?


 그러고 보면 나는 항상 어딘가로 출발하기 전에 방향을 잘 찾는 편이 아닌가보다. 대체로 주변 건물이나 지형 등을 토대로 동서남북을 찾아 떠나는 편인데, 간혹 지도가 북쪽이 위로 되어있지 않거나, 혹은 아예 지도를 잘못 읽는 바람에 엉뚱한 방향으로 출발하는 경우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되니, 평소에는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스스로 ‘그래도 길눈은 밝은 편’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평소와 같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곳에서 처음 깨달았다. 출발하기 전 보아두었던 지도를 기억 속에서 더듬고,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완전 깜깜하네. 역에서 나가서 오른쪽으로 쭉 직진하면 될 거에요.”


갑자기 그녀가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말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진짜? 오른쪽 맞아요?”

“응. 지도에서 본 걸로는 역에서 남서쪽으로 큰길따라 쭉 가면 되는 거였으니까. 지금 여기가… 지금 우리 나가는 방향이 동쪽 맞죠? 맞나?”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어쩐지 나는 반대방향 같아서.”

“아니야. 지도에서 역 앞 큰 길이 동쪽으로 있었으니까, 오른쪽으로 쭉 가면 될 거야. 맞아요.”


 역에서 빠져나오자, 정말 ‘뼛속까지 시린 바람’을 타고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다. 이 도시, 그래도 꽤 큰 도시 아니었나? 뭐 이리 어두운 거야? 많이 늦은 시간도 아닌 거 같은데? 그건 그렇고, 지도에서 봤던 오른쪽 아래는 도심 쪽 아니었어? 어둠에 가려져 저쪽이 아예 보이지를 않는데?

그녀가 갑자기 내 손을 붙들고 반대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빠, 나는 어쩐지 저쪽 같아요.”

“어? 아니야 이쪽 맞을 텐데?”

“일단 이쪽으로 가보자. 내가 보기에는 이쪽이야.”


 아닌 거 같은데… 하긴 내가 가려던 방향이 좀 많이 어둡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손에 끌려가면서, 나는 추위와 배고픔과 길을 찾을 수 없는 불안함을 못 이기고 퉁명스레 짜증을 부렸다. ‘만약 이쪽 아니면 알아서 해.’와 같은 말과 함께. 하지만 곧이어 우리 앞에 노면전차가 서있는 정차장이 말 그대로 ‘짠’ 하고 나타났다.


“오빠! 저기 맞잖아! 우리 숙소 전차로도 연결되어있다고 했어. 어떻게 할래요. 전차 탈래 버스 탈래?”


 나는 혼란에 빠져버렸다. 이쪽이 이쪽 아니라고? 저쪽이 이쪽이면 이쪽은 뭔데? 이쪽과 저쪽이 다르다면 내가 봤던 지도가 거짓이었던 거야? 아니면…

면목도 없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짜증냈던 게 미안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나는 그녀에게 이 한 마디를 전했다.


“나 전차 한 번도 안 타봤어.”






#2. 여기가 아닌 것 같아요! - 미니양


 처음 도착한 곳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은 공항 혹은 기차역, 터미널에 내려 첫 방향을 잡는 순간이 아닌가 싶다. 무작정 택시를 탈 수도 없고,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해 온 몸의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예약된 숙소를 찾아가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다. 


 나도 고래군처럼 하코다테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주위 사물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어두워진 시각. 하코다테역에서 밖으로 나온 고래군과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12월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거리엔 인적은 거의 없었고, 눈은 쉬지않고 내리고 있었다. 노보리베츠와 도야까지 들러 도착한 후라 몸은 천근만근. 힘든 몸이었지만, 큰 짐은 삿포로에 있는 호텔에 맡기고 왔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여러 번의 여행으로 인해 그래도 이런 상황이 낯설진 않았지만, 고래군에게는 아마 많이 당황스러웠나 보다. 있는대로 에민해져있는 고래군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 쉽지 않은 표정을 하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걸어도 점점 어둠속으로 걸어들어갈 뿐, 숙소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 걷다가는 새해를 길바닥에서 맞이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용기내어 고래군에게 말을 했다.


“이 쪽 길이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는 방향을 틀어 조금 걷자, 전차타는 곳이 나왔다. 사실 걸어가도 좋을 거리였지만 전차를 타지 않으면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았다. 눈이 내리고 있는 하코다테가 무섭기도 했지만, 눈 속을 헤치며 내게로 다가오는 전차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안경이 뿌얘질만큼 따뜻했던 전차를 타고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


“아. 이제 살았다.“





#3. 어둠 속 흐르는 눈, 눈부시게 새하얀 아침, 그리고 겨울바다- 고래군


 호텔에 도착해 들어서자마자 온 몸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기운에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만큼 어둡고 차가운 도시는 나를 공포 속에 몰아넣었던 모양이다. 사실 이런 생각도 밝고 따뜻한 곳에 들어서고 나서야 들었다. 그 한 가운데를 거닐 때만 해도 나는 감기약에 취한 것처럼 약간 멍한 상태였다.


 짐을 풀고 나는 길 건너 편의점에서 간식과 맥주를 사기 위해 홀로 나섰다. 호텔 입구 앞에 잠시 멈춰 담배에 불을 붙이고, 앞을 바라보았다. 눈이 쉼없이 내린다. 그런데 눈이… 옆으로 내린다. 아니 옆으로 움직이니까 ‘내리다’가 아니라 ‘흐르다’가 맞겠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눈보라 치는 길을 걷는 것이 왜 위험한 거야? 끊임없이 움직이면 체온은 저절로 유지될 테고, 험한 지형에 다치거나 길을 잃는 게 아니라면 생명에 위협이 되지는 않는 것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나에게 ‘너 따위 나약한 녀석은 얼른 따뜻한 구석으로 꺼져버려!’라고 소리치고 있다. 저 길을 한 시간만 걸어도, 나 따위 나약한 도시 촌놈은 바로 저체온증에 쓰러져버릴 게 확실하다.


 그나저나 눈이 흐르는 풍경은 정말 신비롭고 아름답다. 밤의 검은 어둠은 마치 내가 깊은 바다 어딘가에 서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그 와중에 옆으로 흐르는 눈은 바다가 깊이 감추고 있는 흐름을 목격한 것처럼 내 발길을 붙들어버린 것이다.


 그 웅장한 흐름을 가로질러 로손 편의점에서 맥주와 간식을 사들고, 다시 그 흐름을 건너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그녀에게 내가 본 풍경을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설명하려 했지만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살면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때로는 어휘력이 부족해서, 그리고 때로는 사용하는 언어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거나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언어의 그물 밖에 있다고밖에 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있는 법이다. ‘벅찬 감동’이나 ‘놀라운 풍경’ 따위의 표현은 눈이 흐르는 밤을 헤엄치듯 가로지르면서 느꼈던 그 감정을 편린으로만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 날 아침 햇살을 맞이하기 위해 커튼을 걷어내면서 마주친 풍경을 대하며 느낀 감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뭐랄까? ‘직접 보지 않고는 몰라.’라고밖에 할 수 없는 그 벅차오르는 것은, 역시나 언어에 담아낼 수 없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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