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비밀통로: Interval>

연(緣)+기억(이야기)= 생(生)

by 미니고래



불가사의한 인연으로 맺어진 두 남자 ‘동재’와 ‘서진’, 삶과 죽음 사이의 좁은 틈새에 있는 정체불명의 방에서 만난다.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만난 두 사람은 회의실에 던져진 책-기록(기억)을 중심에 놓고 상대방과 연결됨으로써 몇 개의 전생(前生)을 함께 들여다보고 희망과 절망, 인생의 의미를 탐색해나가게 된다.


연극 <비밀통로>(민새롬 연출, 박주영 각색)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연출가인 마에카와 토모히로(前川知大)가 자신의 극단 이키우메를 통해 2007년에 도쿄도립문화예술회관에서 초연한 연극 <누케아나의 회의실(抜け穴の会議室)>을 각색한 작품이다. 민새롬 각색, 연출을 맡았다. ‘抜け穴(누케아나)’는 글자 그대로 ‘빠져나갈 구멍’을 뜻하며, 일종의 탈출을 위한 비밀통로를 의미한다. 방비를 벗어난 빈틈이라든가 법 또는 제도의 허점 등을 뜻하기도 한다.


연극 <비밀통로>의 극적 구조는 극중극의 형식을 가진다. 알 수 없는 신비한 ‘방’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외부극과 여러 권의 책을 통해 전개되는 ‘전생의 기억-이야기’라는 내부극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중 외부극의 극적 공간은 관객석과 연결되어 지금-여기의 시공간으로 설정된다. 두 사람의 새로운 생을 보여주는 에필로그가 연극의 마지막 장면을 구성하는데, 종막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서진’이 객석을 바라보며 관객에게 직접 (아마 “じゃ、また”를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 “자, 그럼……”이라는 대사를 말한다. 이것은 연극의 가장 강력한 기본 규칙인 ‘제4의 벽’을 갑작스럽게 해체하는 전위적 형식장치이다. 그리고 이 장치는 관객들을 순간적으로 ‘동재’와 ‘서진’처럼 유계를 부유하는 망자(亡子)들로 호명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를 통해 객석은 무대라는 방과 연결된 또다른 방이었으며, 관객 개개인은 그동안 각자의 방에서 ‘무대라는 옆방’을 엿보고 있었던 것이라는 연극적 의미를 생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재’가 무대에서 사라지고 난 이후부터는 이제 관객은 방에 남은 ‘서진’과 함께 전생에 맺어왔던 수많은 인연과 기억-이야기를 확인해볼 차례이다.


한편, 연극이 시작되기 직전, 극장 스태프가 이미 여러 번 반복했던 ‘핸드폰을 비롯한 전자기기의 전원을 꺼달라’는 관람 안내를 또다시 얹으면서, “관객 여러분이 기록이 아닌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던 점도 흥미로웠다. 이것은 앞으로 무대에 올라올 연극의 내용을 암시하는 복선이며, 연극이라는 예술의 성격이 극장이라는 매체와 얼마나 밀접하게 엮여있는가를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원작이 일본 연극이다 보니 연극 <비밀통로>에서는 일본의 문화적 특징이 곳곳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무대 바닥의 다다미(畳, たたみ)를 닮은 무늬라든가 방 내부를 장식하는 화병이나 등불과 같은 소품 등은 연극의 공간으로부터 근대 일본의 정돈된 공간적 스타일을 느끼게 만든다. 연극이 하나의 생(生)에서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해당하는 유계(幽界)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이제는 일본 특유의 불교적 문화 요소가 된 젠(禪, Zen)의 철학과 예술적 관점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연극 포스터에 있는 “도대체 우리는 언제 완전히 죽을 수 있는 걸까?”라는 문구는 사실 굉장히 심각한 오류이다.) 두 등장인물 사이에 운명적으로 엮여있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연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종종 새끼손가락에 묶은 붉은 실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엔(縁)’ 문화의 관점까지도 담겨 있다. 조명을 포함한 영상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사용하는 점은 최근 일본에서 테니프린 이후로 본격적으로 흥행하기 시작한 2.5차원 무대 기법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극적 환상을 효과적으로 조성하기 위해 영상이미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어떤 사건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여 관객이 비판적으로 사고하게 만들고자 하는 서사극적 영상이미지 사용 기법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연극 <비밀통로>는 희곡(대본)의 서사와 설정이 굉장히 촘촘한 작품이다. 이 말은 작품 내부에 배우가 자유롭게 해석하고 채색할 수 있는 여백이 많은 편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그 덕분에 무대 위에 서는 배우의 입장에서는 미리 준비한 연기를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므로 다른 작품에 비해 연기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이 점은 앞으로 연극 <비밀통로>가 신인 배우들이 연극판에 데뷔하는 통로로도 활용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희곡(대본) 차원에서부터 서사가 탄탄하면서도 세부적인 설정까지도 세밀하게 잘 조정되어있다 보니, 배우의 기량이나 컨디션에 따른 편차가 작아지게 된다. 또한 관객의 입장에서도 전반적으로 극의 내용이 이해하기 쉽고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새삼 이웃나라의 연극예술에 관한 호기심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에 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극장에도 찾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연극 <비밀통로: Interval>

2026년 2월 13일 ~ 5월 3일

NOL 씨어터 대학로 우리투자증권홀 (서울 종로구 동숭길 100 2-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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