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결혼을 준비하면서 남편 될 사람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남편에게 ‘우리 다시 시작하자 만나서 얘기하자’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고 교제 기간이 겹쳐 남편에게 물었을 때는 이미 정리된 사이이며 다시 만날 일은 없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식당에서 소리를 지른다거나 할아버지뻘 되는 어른께 반말로 이야기한다거나 운전을 험하게 하는 남편을 보며 결혼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하고 있었고 시어머니께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결혼을 조금 미루거나 안 하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전달 드렸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설득으로 결혼식을 진행하게 되었고 그렇게 지옥 같은 22년간의 결혼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결혼을 하자 마자 남편은 아침 7시에 들어오거나 외박하는 일이 잦았고 결국 2달 만에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벽 두 시에 끊임없이 울려대는 남편의 전화를 받았더니 술에 취한 여자가 어젯 밤에 즐거웠다. 그런데 다음에는 좀 더 좋은 모텔에 가자 등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음날 남편에게 물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잘못 걸려 온 전화라고 했고 저도 설마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하며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남편의 외박이 이어졌고, 집에 있는 시간에도 공부를한다고 방에서 나오지 않는 시간들이 길어졌습니다. 어느 날은 김밥을 말아 방문을 열었는데 남편은 옷을 다 벗고 있는 여자와 채팅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서 그날 밤 맥주 한 캔과 안주를 준비해 남편과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남편은 또 대수롭지 않게 자신은 결혼 전에도 원래 그렇게 살았으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의 그런 생활은 제가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 한 채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밤샘 육아를 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산후조리원이 너무 비싸 집에서 산후 도우미분의 도움을 받았는데 매일 시누이들과 시부모님들이 찾아와서 식사를 하고 가셨습니다. 음식량도 설거지도 늘어나자, 산후 도우미분께서는 저에게 자신이 산후도우미 경력 10년 차에 이런 집은 처음 본다며 돈을 올려 주든가 아니면 그만두겠다는 통보를 하셨습니다. 남편에게 이런 말을 전했지만, 남편은 니가 우리 가족 찾아오는 거 싫어서 지어내는 말이라고 했고 그걸 그대로 전해 시어머니는 어느 집 며느리가 그러냐며 노발대발하셨습니다. 그 와중에도 남편은 밤만 되면 연락이 두절 되었습니다. 첫째 아이가 장염에 걸려 끊임없이 토하고 열이 40도가 나서 입원하게 되어도 남편은 병원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가는 남편에게 분리수거할 상자 하나를 밖에 내놓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듣는 즉시 남편은 너는 하는 것도 없으면서 감히 남편에게 그런 일을 시키냐며 책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 책은 나중에 선풍기가 되고 시계가 되고 조명이 되어 저에게 날아왔습니다. 그 시절 저는 유달리 잠이 없던 아이와 밤을 새우고 혼자 집안일을 하느라 살이 8킬로가 빠지고 갖은 스트레스로 탈모가 심했으며 피부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저만 보면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 있으라고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마지못해 친정에 가 있었지만 엄마는 암 환자셨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친정에 있는 동안 남편은 아이가 잘 지내는지 안부 전화 한 통을 하지 않았고 제가 돌아가도 아이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서야 제가 친정에 가 있는동안 채팅을 통해 여러 여자를 번갈아 가며 만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큰아이가 조금씩 깊은 잠을 자기 시작하고 몸이 조금 회복되었을때 둘째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기뻐하기는 커녕 지우라고 했고 제가 말을 듣지 않자 배를 발로 걷어 차고 저를 미는 등 폭력일 일삼았습니다. 저는 하혈을 했고 유산 위기 까지 겪었지만 아이를 지켰습니다. 그 와중에 남편은 저 몰래 스스로 병원에 가서 영구적 정관수술을 했고 그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좋아했고 결혼 전부터 셋은 낳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남편은 아이를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바람을 마음껏 피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배신감이 들었지만 이미 한 수술을 무를 수도 없었기에 둘이라도 잘키워야겠다 다짐했습니다. 둘째 아이를 낳고도 달라진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산후 조리 기간에도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자주 연락이 두절되었고, 방에서는 비아그라가 발견되었으며 미처 로그아웃을 못하고 나간 채팅창에서는 모텔 이름과 방 번호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나마 집에 있는 날은 영화와 미드 시청을 밤을 새워 했고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 짜증을 내며 티비 소리를 더 키웠습니다. 어느날 아이가 겨우 잠들었으니 티비 소리를 조금만 낮춰달라고 했더니 리모콘이 날아왔습니다. 먹고 싶은걸 마음껏 먹지 못할때는 더욱 짜증을 냈습니다. 저는 나물 종류나 된장국 같은 한식을 주로 했고 남편은 햄버거, 피자, 치킨을 좋아했습니다. 햄버거를 두 개씩, 피자를 한 판씩 혼자 먹었습니다. 결혼하고 살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해서 피자를 한 조각 남기면 어떠냐고 했더니 벽에 집에 던졌고 치킨을 한 마리만 시켰다고 문을 발로 걷어 찼습니다. 남편은 갈수록 종잡을 수 없어져 갔습니다. 어느 날은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 맡기고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해서 극장에 갔다가 늦어서 영화의 시작 장면을 놓쳤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극장이 떠나가라 화를 냈고 어느 날은 마트를 갔다가 사라져서 한참만에 찾았더니 미국남자들은 마트를 다니지 않는다며 자기 개발에 방해가 된다고 화를 냈습니다. 스무번 넘게 교통사고를 내 자동차 보험회사에서 가입을 거절당했으며 아이들을 태우고 저 새끼를 잡아야한다며 160키로로 도로 위를 질주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일은 아들이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팔목뼈가 드러날 정도로 다쳤을때였습니다. 아이는 울고있고 마음이 급했던 저와는 달리 남편은 정차한채 운전대를 잡고 태연히 음성 메세지를 들었습니다. 병원에 다녀와서야 나는 많이 조마조마했는데 왜 계속 기다리라고 하고 음성메세지를 들었는지 급한 일이 있었는지 물었더니 들려오는 대답은 ‘그냥, 니가 서두르는 꼴이 보기 싫어서’ 였습니다. 어떤 날은 서점에서 보드게임을 보고 있던 아들이 빨리 가자는데 말을 듣지 않았다고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었고 어떤 날은 자신이 마실 커피 한 잔을 쏟았다는 이유로 길에서 한 시간 넘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했습니다. 실수라고 아무리 말해도 막무가내 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샀을 때는 그런 걸 왜 사냐고 자신은 받은적 없다고 화를 냈고, 보드게임을 하다 자신이 질 것 같으며 폭발 했으며 고등학교때 유행어라며 아이들에게 뒤질래 라는 말을 수백번씩 하고 식탁을 내리치며 자신에도 도전하는 인간은 다 죽여버린다고 했습니다. 백화점에 양복을 사러가서는 직원이 단골 고객에게만 물을 주고 자신에게는 불친절 했다며 고객센터에 항의를 하러가서 두 시간동안 나오지 않았고 어느 식당에서는 깻잎에 벌레가 나왔다며 사과하는 주인에게 인터넷에 올리고 문 닫게 만들겠다고 협박해 무릎까지 꿇게 만들었습니다. 남편은 늘 그랬습니다 자신의 실수에는 관대하고 타인의 작은 실수는 그냥 넘어가질 않았습니다. 카페에서 커피 잔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던 날 남편은 스무배의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보다 심각한 일도 많았습니다. 어느날 만취해 들어온 남편은 신발장에 구토를 했고 팬티까지 다 벗고 거실에 드러누었습니다. 커가는 딸이 볼까 신경이 쓰였던 저는 남편을 깨웠고 술을 좀 줄이면 안되겠냐고 했습니다. 감히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냐며 분개한 남편은 큰 소리에 놀라 거실로 나온 당시 4살이던 아들의 멱살을 잡고 빙글빙글 돌리며 열려진 베란다 창문으로 던져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아들은 겁을 먹고 바지에 오줌을 쌌고 저는 아들을 놔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남편은 제 얼굴을 손톱으로 정신 없이 할퀴었고 저는 온 얼굴에 밴드를 붙인 채 당시 서울대 입구역에 있던 정신과에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 검사와 상담 후 남편은 성격장애, 채팅중독, 성 중독으로 진단이 내려졌고 향정신성 의약품을 복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시어머니께서 병원으로 찾아가셨고 ‘내 아들이 왜 정신과 약을 먹어야 하냐’ 며 담당의에게 진료 방해가 될 정도로 따지셨고 다음 예약 때 제가 갔을 때는 경찰을 부르려고 하셨다며 더 이상 진료가 힘들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가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형 교회에 다녔고 교회 안에서 ‘가정을 지키는 것이 선교’라고 배웠습니다.
순모임 안에서 친하게 지낸 권사님 두 분께만 제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기도를 부탁드렸지만 혹시 남편이 모임과 교회를 나오지 않게 될까봐 다른 분들께는 비밀을 유지했습니다. 저는 미션스쿨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믿지 않는 친정부모님과 언니에게 어렵게 전도했기에 친정에도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사시사철 음식을 해다 주시고 남편 옷을 사다 보내시는 어머니께 차마 제가 겪고 있는 고통을 말씀드릴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리석게도 제가 노력하면 또 권사님들께서 충고해 주시는 대로 제가 남편을 잘 섬기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좋아질 줄 알았습니다. 시어머니께서도 늘 말씀하셨습니다. ‘걔가 뭐가 부족한게 있으니까 그러겠지 니가 잘해주면 그러겠니’ 저는 교회안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순모임을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저희 집에서 열두 가정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일대일 제자 양육자반을 하고 어머니 학교를 하고 부부 학교를 하고 매주 자녀 축복 기도 모임에 나갔으며 손기철 장로님의 치유 기도집회에 나갔습니다. 그때 예언의 은사가 있으신 권사님께 기도도 받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자매는 이 가정에 심겨졌나니 하나님의 상급이 크도다’ 그 순간 등이 뜨거워 지면서 불에 데인듯 했고 결혼 전 제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친정어머니는 제가 고3때 암에 걸리셨는데 병원에서는 4기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학교가 끝나면 병원 안에 마련된 예배실에 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희 엄마가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제가 대신 천국에 갈테니 엄마를 살려주시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생명을 연장해주세요.’ 그리고 얼마 후 엄마는 암세포가 사라지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이 들자 저는 시댁 식구들을 모두 구원으로 인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습니다. 결혼 당시 교회 집사님이셨지만 때마다 제사를 지내고 주일마다 술을 드셨던 아버님, 사업으로 바빠 주일 예배도 가끔 참석하셨던 시어머니, 교회에 아예 나가지 않았던 시누이, 막내 시누이가 빠져있던 단월드, 모두가 전도 대상자로 보였습니다. 그 후 저는 제 20대를 30대를 정말 열심히,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을만큼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 자신은 사업을 시작하신 부모님께 방치되었고 슈퍼에서 과자만 먹고 살았다는 남편을 위해 요리책을 10권 넘게 구매해 정독했고 남편을 위한 매일 다른 요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집에 매 끼니 같은 반찬, 같은 국은 없었습니다. 저는 한식 중식 일식 양식을 돌아가며 매일 새로운 요리를 했고 요리 잘하시는 친정 어머니를 둔 덕분인지, 요리책 덕분인지 아이들과 까다로운 남편에게까지 엄지척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호텔같은 집을 요구했고 저는 매일 청소를 4시간씩 요리를 두 시간씩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아들과 같은 유치원에 다니던 엄마가 저희집에 놀러 와서는 ‘이 집은 앉기가 미안하네. 애들 있는 집이 어쩜 이렇게 깨끗해요?’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제가 열심히 살면 모든 것이 좋아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기행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혼 10주년이 되던 날 갑자기 안 하던 선물을 사주겠다고 애플워치를 사라고 했고 몇번을 괜찮다고 했지만 계속된 남편의 강요로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자 마자 남편은 돌변했고 갑자기 옷장으로 저를 밀치고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신아 사란다고 니꺼만 사냐, 니가 그러니까 병신 소릴 듣는거야.’ 그 때 아이들은 옷장 옆에있던 침대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반품하겠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시계를 하루만에 중고나라에 처분하고 남편에게 돈을 돌려 주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영화중독으로 새벽까지 영화를 시청하고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못해 출근이 늦어지는 일이 잦았으며 향수라는 영화를 본 후 향수에 중독되어 값비싼 향수를 10개도 넘게 사서 번갈아 가며 뿌리고 다녔으며, 이후에는 와인과 위스키에 중독되어 갚비싼 술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3년 만에 만난 친정 엄마앞에서 아들을 훈육한다는 핑계로 병신, 병신새끼 라는 욕을 했고, 엄마 좀 그만 괴롭히면 안되겠냐고 말하는 딸아이의 빰을 때렸습니다. 제가 손가락 힘줄이 끊어져 4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는데도 과도한 집안 일을 강요했고 자궁근종으로 하혈을 심하게 하고 수술을 했을때도 ‘니가 아프다고 나한테 피해주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이 학대에도 익숙해지고 적응을 한다는 것은 무섭고도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그무렵 저희는 이상한 관계가 되어 있었는데 남편은 더이상 외도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처음보는 여자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정도면 이쁘지 않냐’, ‘이번에 만나는 애는 괜찮은 애다. 집에 데리고 올테니 친하게 지내라.’, ‘어제 만난 애가 잘하는 애라서 좋았다.’ 등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습니다. 어느새 저는 남편의 외도를 용인해 주는 여자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조금씩 지쳐갔습니다. 10년넘게 지속되는 남편의 채팅과 외도, 요리책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음식을 하고 청소를 해도 더 못한 것만 지적하고, 니가 하는게 뭐 있냐고 말하는 남편, 결혼 생활 내내 친정 엄마의 생신과 명절에도 안부 전화 한 통 하지 않는 남편.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생각은 저를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병들게 했고 저는 매일 남편의 눈치를 보며 남편이 눈만 치켜떠도 또 시작되었구나를 느끼며 지진이 난것처럼 심장이 두군거리고 어지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쯤 아이들은 어느덧 자라 사춘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그게 아닌거 같아. 아빠는 우리가 용서해 준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아. 교회 캠프에서 아빠를 위해 목 터져라 기도했는데 더 심해졌어.’ 실제로 저는 그랬습니다. 남편이 미친년아 병신아 욕을 해도 반나절 이상 삐져있다거나, 친정에 간다거나 그런일은 단 한번도 없었고 미안하다고 하면 또 밥을 차려 같이 먹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아빠도 불쌍한 사람이라고 자신의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 받지 못해 저러는 거라고 니네가 이해해 주고 용서해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나의 불안이 아이들의 불안이 되고 나의 공포가 아이들의 공포가 되고 있다는 것을. 저의 쉬운 용서가 남편을 괴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똑똑했고 재능이 많았고 착했습니다. 어렸을때 부터 동화책을 많이 읽어 주었더니 한글을 저절로 깨우쳤고, 영어책을 꾸준히 읽어주었더니 어느새 영어로 대화가 가능해졌습니다.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담임 선생님께로부터 영재원에 데리고 가보라는 말을 들었고 실제로 누나의 수학 문제집을 가져다 풀기 시작하더니 5학년때 정석까지 혼자서 독파했습니다. 딸아이는 음감이 남달랐는데 악보가 필요 없었습니다.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어 듣는 걸 그 자리에서 그냥 쳤습니다. 글도 잘써서 학교에서 상도 여러번 받았습니다. 학교에서 담임선생님께서 불러 상담에 가면 ‘이 아이는 남다릅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압니다. 어머니를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아이들이 이렇게 글도 잘 쓰고, 악기 연주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어려운 친구들도 잘 도와주고 솔선수범 하는지, 저도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어머니의 노하우를 듣고 싶었습니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저는 여전히 하는 것 없는 병신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남편은 갑자기 아이들의 성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서울대나 연세대에 못가면 등록금은 없다’, ‘500원 줄테니 문제집을 이만큼 풀어와라’, ‘이것밖에 못하냐 나 같으면 시간 반만 줘도 너보다 훨씬 잘하겠다’ 라며 아이들을 닦달했습니다. 급기야 딸아이가 성적이 조금 떨어졌다는 이유로 ‘한심하다, 너를 키워준 비용을 갚아라, 옷을 다 벗어놓고 집에서 나가라’ 등의 막말을 했고, 아이들은 자신이 가진 재능을 조금씩 한탄하며 잃어갔습니다.
그 와중에도 아들은 사교육 없이 영재고에 합격했고, 딸아이는 중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자사고에 입학했습니다. 그때 딸 아이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고 국제고에 진학하고 싶어했지만 남편과 아버님은 국제고에 가면 의대에 가지 못한다고, 자사고에 가야 의대를 간다며 무조건 자사고에 진학하라고 강요했고 만날 때마다 무조건 서울 상위권 의대를 가라고 압박했습니다. 딸은 전국 모의고사 상위0.2프로를 받을 만큼 공부를 잘했지만 사교육과 선행으로 단련된 친구들의 내신 성적만큼은 쉽게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아이의 성적표를 가져오라는 시아버님과 성적이 부족한 것을 제 탓으로 돌리며 저를 다그치는 남편 사이에서 저는 말할 수 없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다 딸아이는 18살 9월에 자해를 하고 약을 과다복용한 채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응급실에 나타난 남편은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습니다. 어디 감히 부모를 무시해서 저런 짓을 하냐고 애미나 딸년이나 똑같으니까 꺼지라고 행패를 부리다 병원 관계자에게 쫒겨났습니다. 저는 그 날을 잊지 못합니다. 그 후 개인병원에서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으면서도 딸아이의 우울증은 좋아지지 않았고 서울 대학병원의 모교수님께 진료를 받게 된 첫 날 정신과 병동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퇴원 후에도 여러번의 자살 시도로 응급실을 찾아야 했고 2년 동안 4번의 입퇴원을 반복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남편은 단 한번도 아이를 만나지 않았고 교수님의 호출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해달라는 제 말도 거절했습니다. 심지어 남편은 공부하기 싫어서 쇼하는 거라고, 저런건 처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패죽이겠다고 했으며 아이의 노트북을 던지고 화장대를 부수며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리고 딸이 고3때 결국 자퇴를 하게 되자 집에서 내보내라, 나가서 돈을 벌어와라, 죽고 싶으면 빨리 죽어라 니 동생 공부하는데 방해된다, 등의 막말을 일삼았고 모든 관심은 아들에게로 옮겨져 아들의 성적에 과도하게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쟤는 꼭 서울대를 보내야 한다’, ‘내가 아들 영재고 갔다고 자랑을 얼마나 했는데 내가 창피해서 못산다’, ‘지 동생 앞길까지 망치려고 한다.’ 그러나 아들도 고2가 되자 우울감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힘들다고 죽고 싶다고 하는 아들을 데리고 정신과를 갔습니다. 몇 가지 검사 후 우울증 약을 복용하게 되었고 집중력을 잃어갔고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말이 맞았습니다. 저의 쉬운 용서는 남편의 악한 행동들을 강화했고 저희는 병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모든것을 제 탓으로 돌렸습니다. 어디서 병신같은 것들을 낳았냐고, 니가 잘한게 뭐있냐고, 니가 죽어야 애들이 정신을 차린다고.
저는 딸아이와 함께 다녔던 정신과에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반 평생 정신과 상담을 받아도 잘 변하지 않는다고 남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아이들과 자신이 살 길을 찾으라고, 아이들과 쇼핑도 하고 맛있는것도 사먹고 여행도 가라고, 운동도 하고 회복의 시간의 가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아이들의 회복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부산, 강릉등 여행을 계획했고 딸아이를 헬스장에 등록시키고 백화점에 데려가 예쁜옷을 사입히고, 악세사리도 사주었습니다. 뜨개질을 하고 싶다고해 서울에 있는 모든 뜨개샵을 돌며 예쁜 실을 사모았고 손재주가 좋았던 딸아이는 그걸로 조끼도 뜨고 니트티도 직접 떠입었습니다. 아이의 방도 새로 꾸며 주었습니다 벙커 침대를 사고, 데스크탑을 사고, 피아노를 새로 사고, 바이올린도 새로 샀습니다. 일대일 수영 레슨을 시작하고 바이올린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모든것을 매우 못마땅해 했습니다. ‘니가 돈 쓴다고 걔가 달라질거 같냐, 걔가 너를 이용하는거다, 니가 애들을 더 망쳐놓고 있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딸이 우울증 약을 오래 복용하면서 살이 찌자 관리 안 시키냐, 꼴보기 싫다, 집에서 내보내라 등의 막말을 지속했고 결국 딸아이는 원룸으로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딸아이의 원룸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한 달도 채 안되어 아이는 자해를 심하게 하고 다시 119에 실려 응급실을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날 아이의 상처를 보고 병원 휴지통에 토를 하고 기절 할만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원룸을 다시 내놓고 집으로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남편에게 빌었습니다. 제발 아이들에게 막말하고 욕하지 말아달라고. 협박도 했습니다. 이제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 자식들 다 죽게 생겼는데 그 엄마가 뭘 못할거 같냐.
하지만 역시나 남편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아끼는 강아지에게 주먹질을 하고 발로 걷어 차고 갖다버린다 죽여버린다며 위협했고 실제로 강아지는 탈모가 오고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겁을먹고 뒷걸음질 치며 오줌을 지렸습니다. 딸이 재수를 시작한 기간에도 ‘너 같은게 무슨 공부를 하냐, 너 같은거한테 쓸돈 없다, 돈이나 벌어 와라, 니네는 기생충들이다’ 등의 막말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너무 힘들다고 자퇴를 하고 싶다고 하자 남편은 폭발했습니다. ‘그런 정신머리로 무슨 공부를 하고 나중에 사회 생활을 하겠냐’며 아이들을 모두 내보내라 알아서 돈벌고 알아서 먹고살게 냅둬라 다시는 연락도 하지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은 자신의 방문에 줄을 걸고 목을 멨습니다. 새벽3시에 깬 저는 화장실을 가다 아들 방에서 캑캑 소리가 나는 것을 듣게 되었고 문을 열려고 했지만 잠겨있었습니다. 제가 소리를 질렀는지 딸아이가 깨서 나왔고 힘으로 문을 따고 끈을 끊고 아들을 내렸습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아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무 무섭고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들이 한말은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빠가 전에 하도 죽여버리겠다고 해서 아빠는 내가 진짜 죽었으면 좋겠나봐, 했더니 이게 어디서 감히 나한테 도전하냐고 죽고싶으면 빨리 죽으라고 발로 걷어차고 밟았던날 생각이 계속 난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죄책감과 후회와 미안함으로 죽고싶을 만큼 괴로웠습니다.
그와중에도 남편은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아침에 들어오거나 2박3일씩 들어오지 않더니 급기야 몇 달씩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차라리 마음이 편했습니다. 물론 언제 들어올지 몰라 불안하기는 했지만 저희는 저희끼리 모처럼 게임도 하고 책도 읽고 여행도 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게 정상적인 삶이라는 것을. 막말과 욕설과 협박에 눈치를 보고 불안에 떨며 지낸 날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는지를.
작년 여름에 잠깐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들어오자 마자 집안 꼴이 이게 뭐냐며 물건들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아이들에게 니네는 하는게 뭐있냐 인생 포기했냐 심지어 딸에게 돈을 벌라고 하며 하긴 취업이 안되겠지. 몸이라도 팔던가. 그만하라는 딸에게 씨발년아 말귀를 못 알아듣냐 존나 멍청하네, 라는 막말을 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아이들이 자신 때문에 우울증에 걸린 것을 모르는구나, 자신의 트로피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아이들이 죽어도 상관없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고 그때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정말 이 결혼 생활을 끝내야겠다고. 어떻게 해서든 이혼을 해야겠다고. 그것만이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라고.
남편에게 합의 이혼을 요청했습니다. 남편은 모든 재산을 포기한다고 각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불러준 각서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시부모님께서 남편과 저에게 공동 명의로 증여해주신 아파트의 50퍼센트 지분을 모두 포기한다. 그에 따르는 세금과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금을 모두 제가 부담한다. 그렇게 하면 합의 이혼을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상담실에서 하며 그렇게라도 해서 이혼이 된다면 하고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건 아니라고 변호사님을 소개해 주셨고 변호사님과 통화 후 만나뵙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송이혼을 하려면 증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아이들과 저는 서로에게 증인이 되지만 녹음이나 동영상 사진 등의 자료는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몰래 녹음을 하려다 남편이 휴대폰을 3대나 박살냈고 경찰에 여러 번 신고했던건 남편의 그런적 없다와 쌍방 폭행이다로 끝났습니다. 분명 눈을 부릅뜨고 죽여버린다고 했으나 ,저를 발로 차고 밟고 집어 던진적도 있으나, 경찰이 왔을땐 모두 부인되었고 그렇다고 제가 피를 흘리거나 심각한 외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저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게 없다고 모든 돈은 자기것이라고 주장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저는 주부로 살았지만 그건 남편의 강요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사업을 하셨던 부모님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며 저에게 과도한 집안일을 요구했고 학원비나 교육비는 주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공부를 잘 시킬것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매일 청소를 4시간씩 새로운 요리를 두시간 넘게 했으며 아이들에게 한글책을 두시간씩 영어책을 한시간씩 읽어 주었으며 아이들이 6살이 되어 유치원에 가기 시작하고 나서는 남편 몰래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유치원 정교사 자격증이 있어 어린이집 취업이 잘되었고 시간재 근무라 아이들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얼마못가 휴가를 냈던 남편에게 들켰고 저는 새학기 새학년 학부모 인사도 다 끝난 시점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때 원장님께서 이런 경우는 없다며 매우 곤란하다며 자기는 어디가서 일할 생각 하지 말라고 하셨고 저는 울면서 나왔습니다. 남편은 집안일과 양육을 제외한 모든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대학원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나도 안 가는 대학원을 니가 감히 할 생각을 하냐 라고 했고 어린이집을 해보고 싶다고 했을 땐 매일 전화해서 문닫게 만들테니 각오하고 할테면 해보라고 했고 심지어 교회에서 하는 봉사활동도 못하게 했고 친구도 못만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결혼생활을 유지해 왔던건 아픈 친정엄마와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엄마는 몸이 조금이라도 괜찮으실 때면 직접 담은 된장, 고추장, 간장, 고춧가루, 김치, 반찬 등을 해서 보내셨고 사위와 아이들의 옷을 사서 보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결혼 기간동안 열 번의 이사를 했는데 한여름에 아이를 업고 밖에 있다 더위를 먹기도 했고 독감에 걸린채 한겨울에 이사하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으셨던 엄마는 집을 사라며 1억이라는 큰 돈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때 공동명의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남편이 싫다고, 그러면 안 사겠다고 하도 난리를 쳐서 남편의 단독 명의로 구입하였고 집을 팔때 시세차익을 3억 8천이나 남겼습니다. 그 전에도 2000만원 비과세 통장, 새 집에 들어가며 가전과 가구를 바꾸라고 남편에게 1000만원을 이체해 주셨고, 서울에 오실때마다 현금으로 천만원씩을 주고 가셨습니다. 2022년도에도 5000만원, 2023년에도 1500만원 이체 내역이 있습니다. 또한 남편은 시댁에서 증여해 주신 아파트에 저의 기여도는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 집은 시어머니께서 폐암에 걸려 갑자기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주시겠다고 이미 약속하셨던 집입니다. 물론 남편은 녹음해 놨냐고 녹음해 놨으면 가져와 보라고 빈정댔지만 그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남편이 외도를 해도 남편 편만 드셨던 시어머니께서는 어느날 저희 집에 오셔서 고구마와 포도를 먹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맛있네, 내가 니 맘 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외도하셨고 자동차로 미행했으며 모텔 앞에서 나오는 년놈들을 차로 밀어 죽여버리고 싶으셨다고. 아버님은 화가 나면 상을 엎으셨고 어머니께 니가 없어져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셨고 냉장고 청소를 안한다고 냉장고에 있던 물건을 꺼내 집어 던지셨고 술값으로 천만원씩 쓰며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노라고. 그러시며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주려고 적금을 들고 있다고 하셨고 저희 친정 엄마와 통화를 했다고 애들 엄마 명의로 집을 한채 해주려고 한다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실 아버님은 사업에도 별로 관심이 없으셨다고 합니다. 술 먹고 여자 만나고 회사에도 나오지 않는 동안 어머니께서는 혼자 열심히 공장을 돌리셨다고 합니다. 공장만 돌리면 돈이 나오니까 신이 났다고 하셨습니다. 시어머니께서는 실제로 완전 여장부 스타일이셨습니다. 공장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말을 듣지 않거나 공장 안에서 담배를 피면 혼을 내시면서도 13명이나 되는 그들의 밥을 해먹이고 한번도 미룬적 없이 월급을 지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께서는 자신은 집에 있으면 우울증 걸린다고 저희 아이들을 하루도 봐주지 않으셨고 자신의 세 아이들도 방치해 키우셨습니다. 아들은 다 크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자신에게 해준게 뭐있냐며 어머니를 원망했고 아들이 마음을 못잡고 붕떠서 저러고 다니는게 자기탓인거 같다고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남편은 그런 어머니의 죄책감을 잘알았고 충분히 이용했습니다. 어머니께 용돈을 받아 술을 먹고 여자들을 만나고 여자들에게 파인다이닝을 사주고 비싼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스테이크를 먹고 어머니카드로 쇼핑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의 이혼만은 싫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아들과 살아줄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서 너밖에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가정마다 애물단지가 하나씩 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낸 천사이니 잘 대접해주길 바란다는 부탁도 하셨습니다. 대신 많이 벌어놨으니 돈 걱정은 하지말라고 집도 주고 공장도 주겠다는 말씀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런 어머님은 정작 폐암에 걸려 투병 4개월 정도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시댁 식구들은 재산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아버님은 아들에게 인감을 받아가 유산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어머니의 명의로 되어있던 집을 팔아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유산과 보험금 3억원을 받아 자신의 명의로 건너편 단지의 아파트 큰 평수를 매입하셨습니다. 그 과정에는 시누이가 개입되어 있었는데 ‘엄마 명의로 되어있던 집을 오빠에게 상속해 주면 자신은 평생 아빠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남편은 그래도 아빠를 믿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할 수가 있냐고 따졌고 시누이와 식당에서 멱살잡이를 했으며 아버님께서는 아들을 돌로 쳐죽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후 공장이 적자로 돌아서고 집이 3채가 된 아버님은 세금 폭탄으로 고통받게 되셨습니다. 공장을 담보로도 더 이상 대출이 되지 않자 남편이 근무하는 지점에 가셔서 5억을 대출받으셨고 딸이 한남동 소재의 시부모님의 주택을 증여받을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는 가장 작은 아파트를 증여해 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저 자식 집 잡혀 먹거나 팔아 먹을까봐 아들을 못 믿겠다’고 하셨고 저에게 공동명의로 증여를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집은 알고 보니 엄청난 세금을 물어야 되는 집이었습니다. 취득세나 증여세 6억이야 당연히 내야 하는 금액이었지만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금까지 8억을 내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주가 진행되면서는 세입자에게 2억 5천이라는 전세금도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아버님은 그 후 어느날 소주 4병과 맥주 6병을 드시고 아주 속이 시원하다고 앓던 이를 뺀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남편은 계속 친정에서 돈을 받아서 니 세금은 니가 내라고 압박했고 아버님께서는 집을 주었으니 감사의 표시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적금에서 천만원을 찾아 아버님께 드렸고 시도때도 없이 아버님이 부르시는 술자리에 불려 나가게 되었습니다.
남편에게 어려움을 호소하면 ‘야 니가 술상무라고 생각하고 그냥 끝까지 마셔’ 라는 말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입시생이 되자 아버님께서는 학과 선택부터 원서지원의 모든 과정에 개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한달에 75번씩 전화를 걸기 시작하셨고 서울대 의대 합격이 가능한지 물의셨고 그건 좀 힘들 것 같다고 하면 ‘지금까지 뭐했냐 창피하다’ 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들이 힘든 학교에서 누구보다 성실히 열심히 학교 생활을 하였고 제가 생활기록부를 봤는데 정말 모든 교과 선생님들의 칭찬이 가득하다고 말씀드렸더니 ‘그게 무슨 헛소리냐 대학을 잘가야지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다그치셨습니다.
결혼 생활 동안 제가 본 남편의 모습은 늘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영화, 미드, 향수, 와인과 위스키, 채팅, 음란물등..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걸 못 하거나 먹고 싶은걸 먹지 못하면 아이 생일날도 명절날도 과도하게 화를내며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해댔습니다.
생각해 보면 남편은 결혼 전에도 제가 헤어지자고 다시 찾아오지 말라달라고 부탁하면 집 앞에 찾아와 소리를 지른다거나 해변에서 소주를 병 째 마시고 모래를 퍼먹으며 자신이 죽을거라고 위협하거나 군대 생활도중에 새벽3시에 전화해 탈영한다고 영창갈거라고 협박하는등 과도한 집착으로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물론 제 모든 결혼 생활이 불행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남편도 어느날은 ‘내가 제정신일때 말하는데 나같은 인간이랑 사느라고 고생많다’ 라고 말했고 그말은 이 사람이 알긴 아는구나 그럼 달라질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이좋은 남매는 매년 크리스마스나 엄마 생일 때면 바이올린과 플루트 공연을 준비해 초대장을 보내주는 기특한 아이들이었고 구세군 냄비 종소리가 들리면 길을 건너가서도 지갑을 열어 자신의 남은 용돈을 모두 털어넣고 오는 착한 아이들 이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저는 모든 것이 잘 되리라 남편도 언젠가 후회하고 가정으로 돌아오리라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렇게 22년의 시간이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그만 헛된 희망을 버리려고 합니다.
작년에 딸아이는 아빠의 노트북에서 채팅 내역과 모텔 예약 내역을 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죽으려고 약을 먹고 목을 메는 동안에도 남편은 휴대폰을 두세개씩 쓰면서 채팅을 하고 룸싸롱을 다니며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 것들, 병신같은 것들, 우울증의 핵심은 나르시시즘이니 빨리 회개하고 죽으라는 등의 막말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몸의 통증 때문에 매일 진통제를 먹으며 집안일을 했고 이제는 진통제를 몇 개씩 먹어도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딸의 호소로 병원에 가게 되었고 심장판막에서 피가 새고 있다고 수술을 해야할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으며 자율신경실조증, 위와 자궁에 용종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급격한 시력 저하 등의 결과를 듣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다녀와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시어머니처럼 나도 갑자기 죽게 되면 누가 우리 아이들을 책임져 줄까, 나는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을 해줄수 있을까, 아이들을 남편에게 부탁할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아빠를 용서하고 잘 지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때 교회 상담실에서 들었던 말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남편이 제가 남편이 퇴근하고 왔을때 웃지 않았다고 표정이 마음에 안든다며 새벽까지 삿대질과 욕설을 하고 잠도 못 자게 괴롭혔다고 했더니 상담 실장님께서 해주셨던 이야기였습니다. 자매님 군대를 갔는데 상관이 군대생활 내내 그것밖에 못하냐고 갈구고 욕을 하고 때리고 괴롭혔다고 칩시다. 그리고 제대 후에 길에서 우연히 그 상관을 만나게 되었다면 표정이 어떨까요? 반가울까요? 웃지 못했다면 그건 나도모르게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지 자매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언제가 남편이 술을 먹고 들어와 불만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저는 또 속는거 같았지만 계속되는 남편의 재촉에 아이들과 나를 좀 사랑으로 대해 주면 안되겠냐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부모에게 더 받지 못한 사랑만 원망하지말고 사랑을 베풀다보면 그 마음도 좀 채워지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남편은 ‘아줌마 뭘바래?’ 그러고 끝이었습니다.
더 이상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를 닮아 잘못한 것도 없이 아빠가 뭐라 하면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하던 아들, 아빠를 이해하고 용서하려고 애쓰다 지쳐 차라리 자신을 찌른 딸에게 저는 조금만 더 견뎌 보자고 말할 명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고통스러웠습니다. 22년간의 결혼 생활동안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고 정말 힘들었는데, 그걸 증명해야 이혼이 가능하다니…. 그렇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과 사는건 아니라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것도 내가 살아있어야 가능한 것이라고,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 때문에 자책하고 자신을 망가뜨리지 말라고, 이제 엄마도 남은 삶을 그렇게 살겠다고 말해주려고 합니다.
저희는 이제 이런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끝내기를 원합니다. 낙천적이고 다정한 타고난 성품대로 하루를 살아도 마음편하게 웃으면서 살기를 소망합니다. 상처 많은 아이들이 언젠가 회복되어 다시 사람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자신의 인생을 소중하게 꾸려가기 소망합니다.
그것이 저희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이에 절박한 심정으로 구조요청을 드립니다.